을미개혁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김홍집내각이 추진한 근대적 개혁운동이다.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초까지 3차에 걸친 갑오개혁 중 제3차 개혁을 을미개혁이라고 한다.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우체사와 소학교 설치, 군제 개혁 등이 단행되었는데,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반일감정이 극도에 이른 상황에서 시행되어 저항이 심했다. 특히 강제로 시행된 단발령은 반일·반개화 의병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의병운동이 진행되는 중에 김홍집 등 개화파 인사들이 성난 군중에 의해 피살되었고 아관파천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일반적으로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을 넓은 의미의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 하며 그 중 제3차 갑오개혁을 을미개혁(乙未改革)이라고도 한다. 이 개혁이 추진된 기간은 1895년 8월 하순부터 1896년 2월 초순까지인데, 이 기간 동안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전후로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논자에 따라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김홍집내각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갑오개혁은 19세기 말 한국 사회에 가장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청일전쟁이 개시되는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기 직전까지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비록 일본의 강압 하에 이뤄졌다고 하지만, 한국사에서 그처럼 단기간에, 넓은 부문에 걸쳐, 일사천리식으로 개혁정책이 추진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갑오개혁을 전근대와 근대를 획하는 분기점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의 개화파 인사들과 농민층이 개혁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 이래 조선을 지배하고자 기도했던 일본의 목표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내정개혁’을 표방하였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넓게 보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좁게 보면 신내각의 인사들이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추진한 근대적 개혁이었다. 갑오개혁에는 조선측 개화파인사들의 구상이 부분적으로는 반영되었기 때문에 갑오개혁을 순전히 일본의 강요에 의한 타율적 개혁이라고 보지 않고, 일부는 자율적 측면도 있었다고 보고 있다.
대체로 1차 개혁의 골자는 주로 청국과의 단절을 명기한 것과 왕실사무와 국정을 분리한 점, 그리고 중앙의 제도와 사회개혁을 추진한 것이었다. 2차 개혁에서는 지방제도를 중심으로 개혁하였다. 이처럼 1차 · 2차 개혁은 국가운영상의 큰 골격을 다듬고 가지를 정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3차 개혁, 즉 을미개혁에서 일제는 주로 조선 ‘보호국화’를 강행하기 위한 극단적 조치로서 보다 원시적 방식을 채택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에 막대한 배상금과 대만 · 요동반도 · 팽호도의 할양을 강요하여 만주와 중국으로 침략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 프랑스 · 독일의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은 마침내 요동을 청국에 반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환경은 곧바로 조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조선정부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조선 지배 기도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범진(李範晋) · 이완용(李完用) 등을 기용한 반일내각이 형성되었고, 러시아공사 베베르(W○ber, K., 韋具)의 활약과 함께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된 데 이어 조선에서도 실세할 위기에 처한 일본은 조선정부가 러시아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비상수단을 취하였다. 이것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는 극단적인 조치였다. 시해사건 직후 일본공사는 김홍집내각을 등장시켰다. 김홍집내각에서는 그동안 중지되었던 개혁을 재개하여 내외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을미개혁은 시기적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국민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이른 상황에서 강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개혁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성왕후의 시해에 이어 강제적으로 시행된 단발령(斷髮令)은 전국의 유림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일 · 반개화 의병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나의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나의 두발은 자를 수 없다”고 한 최익현(崔益鉉)의 항변은 강제적 단발에 대한 유림의 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정부는 중앙의 친위군대와 일본군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서울의 병력이 지방으로 내려가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신 · 구러시아공사 스페이어(Speyer, A., 士貝耶) · 베베르, 미국대리공사 알렌(Allen, M. N., 安連), 그리고 몇몇 친러 · 친미인사들의 협조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 즉 아관파천(俄館播遷)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김홍집내각은 전복되고 일본의 입지가 추락하였다. 이에 따라 강제에 의한 개혁이 중단되었으며, 구내각의 김홍집 · 정병하(鄭秉夏) · 어윤중(魚允中) 등 정부의 몇몇 개화파인사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각기 성난 군중에 의해 피살되었다.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는 조선정부의 각부에 약 40명의 일본인 고문들을 배치하도록 강요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반면, 조선의 대신들은 빈번한 인사교체로 인해 개혁의 큰 가닥을 잡는 것조차 용이하지 않았다. 독자적 노선을 추구하던 박영효는 이미 ‘반역음모사건(1895. 7. 6)’의 날조로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때의 개혁 주요 내용은 태양력의 사용을 비롯하여, 종두법시행, 우체사 설치, 소학교 설치, 1세1원(一世一元)의 연호 사용, 군제의 개혁, 단발령의 공포 등이다. 훈련대와 시위대를 해산, 재편하여 중앙에는 친위대 2개 중대를, 평양과 전주에는 진위대(鎭衛隊) 각 1개 대대를 두어 육군을 편제하였으며, 국내의 통신망 확장을 위해 개성 · 수원 · 충주 · 안동 · 대구 · 동래 등지에 우체사를 두었다. 「소학교령(小學校令)」을 제정, 공포하여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관립 · 공립소학교를 설치하였다. 또한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기하여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채택하였다. 이어 단발령을 공포하여 상투를 자르게 하고 망건의 착용을 금지하였으며, 외국 의복의 착용이 무방함을 고시하였다.
을미개혁은 일본의 과도한 간섭과 왕후시해, 단발령의 강행 등으로 크게 반발을 샀기 때문에 개혁의 정당성과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인 일반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특히 강제적인 단발령 등에서는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목표가 뚜렷이 드러나 조선 조야의 반발을 거세게 받았다. 을미개혁이 초기의 갑오개혁에 비하여 긍정적인 평가와 의미를 상대적으로 덜 받는 이유는 바로 이점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을미개혁이 제한적이나마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이유는 긴 안목에서 볼 때, 근대화에 관건을 이루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