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

이완용
이완용
법제·행정
인물
대한제국기 외부대신서리,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을사5적 · 경술9적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경덕(敬德), 일당(一堂)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8년(철종 9) 6월 7일
사망 연도
1926년 2월 11일
본관
우봉(牛峰, 지금의 황해도 금천)
출생지
경기도 광주
관련 사건
을사조약|한일합방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완용은 대한제국기 외부대신서리,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을사5적이자 경술9적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58년(철종 9)에 태어나 1926년에 사망했다. 관직생활 초기에는 수구파였으나 1년간의 미국 체류 후 친미파로, 러일전쟁 후에는 친일파로 변신했다. 잠시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을사늑약을 적극 추진한 공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다. 고종의 양위, 한국군대 해산 등을 주도했다. 1910년에는 순종을 압박하여 합병조칙을 받아낸 공로로 백작 작위를 받았다.

정의
대한제국기 외부대신서리,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을사5적 · 경술9적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우봉(牛峰)이고, 자는 경덕(敬德)이며, 호는 일당(一堂)이다. 조선 말기 고위 관료를 지내고 국권을 일제에 넘긴 ‘을사5적’ 중 거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가난한 선비 이호석(李鎬奭)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대대로 노론 계열에 속하였으며, 호석의 5대조 이재(李縡)는 숙부 만성(晩成)이 신임사화때 노론 계열로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인에 은거하며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11세때 먼 일가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호준(李鎬俊)에게 입양되었다. 이호준은 명문양반으로 노론파의 후손이고 대원군과 교우하였다. 서형(庶兄) 이윤용(李允用)대원군의 사위이다. 이러한 가정환경 아래 13세때 명문가문인 조병익(趙秉翼)의 딸과 혼인하였다.

20세때까지 전통적인 한학교육을 받았고 25세때 증광별시(增廣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관계로 진출하였다. 1886년 4월 규장각 시교(侍敎)에 임명되고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6품의 직에 올랐다. 임금 가까이에서 지내며 민비의 총애를 입고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 그 일환으로 민종식, 이준용 등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갑신정변의 잔당인 신기선(申箕善) 등을 국문하여 그 세력을 뿌리 뽑을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구한말 미국과의 교류가 긴요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1887년 3월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 최초 주미 공사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1887년 9월 주미참찬관으로 임명되었고 전권공사 박정양, 서기관 이하영, 이상재 등과 함께 주미공사관 외국인서기관 알렌(Horace. N. Allen, 한국 이름 안연(安連))의 인도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1년여간 체류하면서 미국의 독립사상과 근대문명의 발달을 경험하는 한편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라는 세계 흐름과 힘의 논리를 인식하게 되었다. 1888년 12월 임시대리공사로 재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890년 10월 귀국하였다. 이후 대미외교의 1인자로 친미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0년 호조참의 좌부승지, 내무부 참의가 되고 1891년에는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동부승지, 내무 협판 등을 지냈다. 1892년에 이조참판, 1893년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외무협판 등을 두루 거쳤다.

1895년 5월 친미 친러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학부대신에 임명되었고 이채연(李采淵) 등 친미파와 함께 알렌의 이권 획득 요구에 적극 협조하였다. 같은 해 10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이윤용, 이하영 등 친미파 인사들과 함께 미국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였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친러파 인사( 김홍륙, 이범진 등)들과 공모하여 ‘춘생문사건’을 일으켜 정권탈취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96년 2월 11일 알렌의 후원하에 이범진 등 친러파와 공모하여 ‘아관파천’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사건 주모자들은 친일파 세력을 몰아내고 내각의 요직을 장악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시작한 신내각에서 외부, 학부대신과 농상공부 서리와 군부대신 겸 경무사 등 5개 직책에 동시에 임명되었다.

1896년 7월부터 1898년 초반까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면서 위원장, 부회장 및 회장직을 맡았다.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자주독립을 외치며 신정치운동을 표방하는 데 앞장섰고, 고종의 환궁운동을 전개하여 실현시켰다. 이후 러시아 세력의 경계와 압력을 받고 학부대신에서 물러나 1897년 9월 평남 관찰사로 전임되어 외직으로 밀려났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동년 3월 11일 전북 관찰사로 전임되면서 실질적인 활동은 중지되었다. 또한 1898년 7월 17일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책임을 물어 제명 처분되면서 공식적으로 완전히 독립협회에서 떠났다.

1898년 3월 전북 관찰사 재직시 직무태만으로 감봉 처분을 당하였고 거액의 민재(民財)를 착복하여 관찰사직에서 파면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그해 12월 징계 특면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계속 외직에서 지내며 시세를 살피다가 1901년 2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관계로 복귀하였다. 이후 국내외 정세 변화와 함께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였다.

1905년 9월 학부대신이 되어 9년만에 다시 대신의 자리에 앉았다. 같은 해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해 대신들을 위협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을사5적’ 가운데 한 명으로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었다. 조약 체결에 앞장선 공으로 의정대신임시서리 및 외부대신서리에 임명되었다. 1907년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농상공부대신서리 · 광산사무국총재까지 겸하였다. 이 해 6월 이른바 내각관제가 공포되자, 내각총리대신으로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였다.

1907년 7월 내각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일제의 요구에 부응하여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의 강제양위를 주도하였다. 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7적’ 가운데 한 명으로 지탄을 받았다. 조약체결 직후에는 한국군대를 강제해산시켰다.

1907년 의병장들을 중죄로 처벌하고 미체포한 의병부대 지휘관들을 체포할 것을 순종 황제에게 요구하였다. 1909년 7월 12일에는 통감 소네아라스케(曾禰荒助)와 함께 ‘한국사법 및 감옥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에 내각총리대신의 명의로 서명함으로써 사법권을 일본에 위임하였다. 같은 해 7월 26일에는 ‘한국중앙은행에 관한 각서’를 조인하여 중앙은행의 운영과 권리에 대한 집행 및 감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도록 하고 한국 재정 및 경제권을 양도하는 데 앞장섰다. 이와 같은 매국적 행위로 인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암살 1급 대상자로 지목되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鐘峴天主敎會堂)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그달 17일 사망)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가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피습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으나 운좋게 살아났다.

1910년 8월 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 체결 협상을 벌이고, 동년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황제를 압박하여 합병조칙을 받아냈다. 이에 마침내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게 넘어가고 ‘경술9적’ 중 1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정부로부터 합병에 관한 공로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고, 1920년 12월 28일 후작으로 올라갔다. 사후 손자 이병길이 작위를 물려 받았다. 1910년 10월부터 1912년 8월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면서 총독의 자문에 응하였다. 1916년 8월 4일 『매일신보』에 왕세자의 혼인과 관련하여 “병합하여 한 국가가 된 후에는 황족간의 결혼은 당연한 일”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내선융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19년 3 · 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게재하여 만세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하고 저항운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후작이 되고, 농림주식회사고문 · 교육조사위원 · 총독부산업조사위원 · 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 · 조선사편찬위원회고문 등의 명예직을 두루 겸하며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하였다. 1924년 4월 항일운동에 대항하여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내걸고 결성된 친일단체 동민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2월 11일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앓던 해수병이 악화하여 사망하였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 묻혔으며, 정치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이었다.

일제에 협력한 공로로 1907년 10월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고, 한일합병조약 체결 직후인 1910년 8월 금척대수장을 받았다. 1911년 1월 1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1912년 8월 합병에 대한 공로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11월 다이쇼 일본왕 즉위시 참석한 공로로 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18년 4월에는 정3위에 서위되고 사망 후 정2위와 대훈위 국화대수장에 추서되었다.

이완용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3 · 4 · 6 · 7 · 9 · 13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33~57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
『황성신문(皇城新聞)』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정교(鄭喬))
『매천야록(梅泉野錄)』(황현(黃玹))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이완용의 변신과정과 재산축적」(임대식, 『역사비평』 22, 1993)
「이완용의 곡예:친미·친로에서 친일로」(이이화, 『역사비평』 19, 1992. 여름호)
「친미·친러파로서의 이완용 연구」(김행선,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4)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이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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