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는 1896년 경성에서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운동을 전개한 정치·사회 단체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 정치 단체로 독립문 건립 기구를 표방하여 창립된 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해산되었다. 자강을 통한 자주 독립을 주장하며, 내부에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점진적 개혁 노선과 관료에 의한 권력 독점을 지향한 노선이 병존하였다. 「헌의6조」를 제출하여 중추원관제 개편이라는 성과를 얻었으나, 구제(舊制) 복구를 주장하는 보수 세력의 반발을 받았고, 급진파의 과격한 활동을 황제권 강화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고종에 의해 해산되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공포로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896년(고종 33) 2월 11일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아관파천은 일본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데 동기가 있었지만, 국가 독립의 상징적 존재인 국왕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자주권 회복, 정치적 혼란 수습, 국민 통합이 당면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국간섭(三國干涉) 이후 왕실과의 관련 하에 반일적 입장을 취하던 정동파(貞洞派)를 중심으로 한 내각은 정부 시책을 국민에게 알릴 수단으로 민간지의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이들은 서재필(徐載弼)의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창간[1896년 4월 7일] 및 그 배포를 적극 지원하였다.
1896년 3월 서재필을 신문 담당 부서인 농상공부의 임시고문관으로 취임하게 한 것도 적극적 지원의 한 가지 예로 꼽힌다. 이어서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는 당초 독립문(獨立門)과 독립공원(獨立公園) 건립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를 표방하였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손상된 군주 및 왕실 권위를 회복하려는 조치의 일환으로 독립문을 세워 세계 만국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보여주려는 독립협회의 창립을 허가하였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외부(外部)에서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전문 21조의 독립협회 규칙을 심의‧제정하여 공포하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선출된 임원진은 고문에 서재필, 회장 겸 회계장에 안경수(安駉壽), 위원장에 이완용(李完用), 위원에 김가진(金嘉鎭) · 김종한(金宗漢) · 민상호(閔商鎬) · 이채연(李采淵) · 권재형(權在衡) · 현흥택(玄興澤) · 이상재(李商在) · 이근호(李根澔) 등 8명, 간사원에는 송헌빈(宋憲斌) · 남궁억(南宮檍) 등 10명이었다. 이들은 시범적으로 도합 510원을 헌납하였다. 1896년 10월 19일에는 다시 한번 간사원과 위원을 확충시켰다.
창립 초기 임원진은 서재필 외 이완용, 민상호, 이채연, 현흥택, 이상재 등 정동파라고도 불렸던 친미파 인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한편 이들과 더불어 갑오개혁(甲午改革)에 참여하였던 세력 중 아관파천 후에도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았고 일본과의 연관성을 유지하였던 자들로서 안경수, 김가진, 김종한, 권재형 등이 결합하였다.
창립 초기 독립협회 구성원 대부분은 1880~1890년대 외교‧문화 사절단 일원 내지 유학생으로 외국을 시찰하거나 광무국(鑛務局) 등 신식 기구와 개항장 등지에서 실무에 종사하였던 경력이 있었고, 대체로 현직 관료였다. 신분상으로는 전통적 양반 가문 출신이라 보기 어려운 자들이 많았고, 유교 교육 외에 특별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는 인물들도 많았다. 이 시기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이었던 서재필은 독립협회 인사들과 그들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미국, 러시아에 대해 호의적 논조를 펼쳤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아관파천 1년 만에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한편 독립협회 내에 정부 내 고위 관료들이 대부분 가담하고 다양한 정파가 혼재하게 되자, 독립협회가 관료들의 사교 모임으로 변질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었다. 이에 서재필 · 윤치호(尹致昊)는 토론회 개최를 발의하고 결정하는 동시에 집행부 권한을 강화하는 직제 개편을 추진하였다.
윤치호는 독립협회를 강의실, 독서실, 박물관을 갖춘 계몽단체로 변모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 결과 1897년 8월 29일부터 독립협회의 정기 집회는 토론회 방식으로 전환되었고, 이전의 위원장 ‧ 위원제가 폐지되고 대신 회장 ‧ 부회장 ‧ 서기 ‧ 회계 ‧ 사서로 변경되었다. 이때의 임원진을 살펴보면 회장은 안경수, 부회장은 이윤용(李允用), 서기에 윤치호 ‧ 이상재, 회계 권재형 ‧ 이근영(李根永), 사서 이채연, 부사서 이계필(李啓弼) ‧ 이종하(李鍾夏) 등을 선출하였다. 이후 토론회는 1897년 8월 29일부터 76명의 회원이 참가하면서 시작되어 매주 독립관에서 개최되었다.
1898년 2월 27일 독립협회는 또 한 차례 회칙 개정과 임원 개편을 단행하였다. 회장 이완용, 부회장 윤치호, 서기 남궁억, 회계 이상재 ‧ 윤효정(尹孝定), 제의(提議) 정교(鄭喬) ‧ 양홍묵(梁鴻默) ‧ 이건호(李建浩), 사법위원에 안영수(安寧洙), 강화석(姜華錫), 홍긍섭(洪肯燮) 등이 선출되었다.
이윽고 1898년 3월 러시아가 물러난 후 독립협회는 국내 문제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협회 내부에서도 주도 세력 변동이 일어났다. 먼저 이완용이 전라북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부회장이었던 윤치호가 회장 대리로서 독립협회를 지도하게 되었다. 더욱이 5월 27일 서재필은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 독립협회에서는 고위직 관료 상당수가 퇴진하는 대신, 갑오개혁 이후 설립되었던 신식 학교와 외국 유학생 비중이 높아졌다. 정부 하급 실무 관료와 언론인 및 교사들이 대거 가입하였고, 연령층도 창립 초기에 비해 젊어져 세대 교체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써 협회 성격은 정치 운동 단체로 변모되었다.
안경수 쿠데타 음모 발각 후 1898년 8월 이뤄진 임원 개편에서는 회장 윤치호, 부회장 이상재, 서기 박치훈(朴治勳) ‧ 한만용(韓晩容), 회계 이일상(李一相), 사법위원 이채연 ‧ 남궁억 ‧ 정교와 더불어 평의원(評議員) 20명을 선출하였다. 이들 평의원들은 회원들이 서면으로 제출한 현안 중 주요 안건을 선정, 정리하여 협회에 보고하고 황제와 정부 대신에게 건의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점 독립협회 회원은 4,173명에 달했다. 그런데 이때의 개편을 통해 새로 임원으로 선출된 인물들은 독립협회 지도자 구속 당시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총대위원(摠代委員)이 되거나 제소위원(製疏委員)이 되는 경우도 없었다. 이들은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8년 11월 4일 조병식(趙秉式) 등의 공화정(共和政) 수립 무고(誣告)로 인해 해산되었다가 복설된 독립협회는 12월 3일 정기총회를 갖고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총회원 4173명 중 참석 271명, 유고(有故) 불참(不參) 112명, 무고(無故) 불참이 3,800명으로 실제 독립협회의 운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은 400명이 조금 못 되는 숫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98년 12월 6일 이후 재개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급진파 인사들이 대정부 공세를 강화하고, 박영효(朴泳孝) 소환 운동을 벌이자 불안감을 느낀 고종은 12월 23일 군대와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독립협회와 지도부를 체포하였다. 12월 25일에는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한다는 조칙을 발포하여 독립협회는 실질적으로 해산되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직후 독립문 건립을 위한 모금을 전개하였다. 이때 왕실은 왕태자(王太子) 명의로 1,000원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보조금을 납부한 사람은 모두 독립협회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독립협회는 매주 토요일 회의를 열어 독립문 ‧ 독립공원 계획을 논의하였고, 1896년 11월 21일에는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을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1896년 11월 30일에는 협회의 기관지로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를 간행하였다.
1897년 5월 23일에는 왕태자가 국문으로 친서하여 하사한 ‘독립관’ 현판식을 가졌다. 이어 8월 13일 개국 기원절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고, 같은 달 23일에는 고종의 탄신 경축회를 거행하여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다. 1897년 10월 고종을 황제로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독립협회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1898년 말에는 독립문이 완공되었다.
1898년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의 내정 간섭이 노골화되었다. 러시아는 자국 군사교관이 지휘하는 군대로 하여금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광산 · 석탄 채굴권을 요구하는 한편, 군사교관 증파(增派), 재정고문 알렉세예프(K. A. Alexeiev)의 파견을 강력히 추진하는 등 조선의 내정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러시아는 조선의 독립을 돕던 나라에서 독립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으로 부상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본격적으로 반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러시아는 목포(木浦)와 진남포(鎭南浦)에서 토지를 매입하고, 부산 절영도(絶影島) 석탄고 기지 조차(租借)를 요구하는 한편, 한러은행(韓露銀行) 설립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독립협회는 국가 독립 문제를 토론회 주제로 상정하여 러시아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였고, 2월 21일에는 안경수 등 135명 회원이 연명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자립(自立)하여 타국(他國)에 의뢰(依賴)하지 않고 자수(自修)하여 일국(一國)에 정법(政法)을 행(行)하는 것”이 국가의 요체임에도 불구하고 재정, 군사, 인사권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전장(典章)과 법도(法度)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안으로는 장정(章程)을 실천하고 밖으로는 타국에 의뢰함이 없게 하여 우리의 황권을 자주하고 국권을 자립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2월 27일에도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석탄고 기지 조차 요구를 성토하고 외부대신(外部大臣)에 전말을 묻는 공한을 발송하였다.
이러한 독립협회의 활동은 반러 운동을 더욱 고조시켰고, 러시아 측은 만일 한국 측이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이 불필요하다고 여긴다면 철수하겠다며 24시간 내에 회답하라는 통첩을 정부에 보냈다. 이에 이완용과 서재필은 정부의 러시아 군사교관, 재정고문 철수 결정을 유도하기 위한 민중집회 개최를 결정하였다.
3월 10일 종로에서 열린 이 집회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개최하였다는 의미에서 만민공동회라고 한다. 이때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주도한다는 인상을 피하고자 상인을 의장으로 뽑고, 배재학당 ‧ 경성학당 학생들로 하여금 연설하게 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 결의안을 채택해 정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마침내 3월 11일 고종은 주한러시아공사에게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요구하는 회답을 보내도록 정부에 지시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은 해임되었고 한러은행도 폐쇄되었다.
1898년 3월 이후 러시아의 내정 간섭이 약화됨에 따라 독립협회는 국내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내정 개혁을 충실히 진행하여 독립의 내실을 기하는 것이 급선무라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독립협회의 운동 방식은 집회에서 주제를 정해 토론하고 결과를 편지로 써서 총대위원 편에 보내는 것이었고, 이 활동은 만민공동회를 동반하였다.
정부도 독립협회의 요구에 답변을 성실히 보내고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독립협회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수호, 노륙법(孥戮法) 및 연좌법(連坐法)의 부활 저지, 언론과 집회의 보장, 탐관 및 수구파 관료의 규탄 내지 축출, 의회 개설 등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갔다.
이 무렵 고종은 「의정부차대규칙(議政府次對規則)」을 부활시키고 각국의 사례에 따라 황제가 육해군을 통솔하겠다는 조칙을 반포하는 등 황제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협회 내부에서는 황제권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던 두 노선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대내적 관민 통합과 대외적 자주 독립을 위한 국권의 상징으로서 황제권을 인정하되 교육, 계몽을 통해 점진적 제도 개혁을 실현시키려 했던 계열이었다(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계열). 다른 하나는 황제 중심의 권력 구조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급진적 체제 변혁을 도모하였던 계열로, 이들은 일본 망명 중이었던 박영효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안경수, 정교 계열).
이들 중 안경수, 정교 계열은 7월 3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고종에 상소를 올려 홍범(洪範)의 준수와 민의(民意) 수렴 등을 요구하는 한편, 의정부 대신의 부정, 부패, 무능을 비판하고 교체를 주장하였다. 윤치호는 이들이 제기한 강경한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회장으로서 배척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7월 5일 안경수, 윤효정 등이 박영효의 사주를 받아 독립협회 회원 50명을 입궐시켜 고종에 양위를 강요하고 황태자로 대리하게 하려 했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었다.
이때 안경수 등은 고종을 폐위한 후 표면상 황태자를 추대하였다가 그후 다시 의화군(義和君)이나 이준용(李埈鎔)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음모가 발각된 후 안경수, 윤효정은 일본 공사관의 비호로 피신하였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고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협회에 반감을 갖고 혐의자로서 박정양(朴定陽), 민영준(閔泳駿), 김재풍(金在豐), 이충구(李忠求) 등을 체포하였고 아울러 민영기(閔泳綺), 심상훈(沈相薰), 이재순(李載純), 조병식(趙秉式) 등을 대거 내각에 기용하였다.
조병식, 이종건(李鍾健) 등 수구파 관료들은 '안경수 쿠테타 음모 사건'을 빌미로 독립협회 회원 전체를 안경수와 한 패로 무고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정계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이들은 ‘대한청년애국회(大韓靑年愛國會)’라는 단체 명의로 황태자의 대리를 요구하는 전단을 날조하여 독립협회 탄압을 유도하였다.
독립협회는 이에 맞서 종로에서 황국협회(皇國協會), 만민공동회와 합동 집회를 개최하여 대한청년애국회를 색출하여 없애자고 호소하고 조병식을 탄핵하는 서한을 보냈다. 안경수 쿠데타 음모와 조병식 탄핵 문제에 대한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고종은 윤치호를 면담하였고, 그 결과 조병식을 면직시키고 박정양과 민영준을 방면하여 독립협회와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1898년 9월 11일 전 러시아 공사관 통역 김홍륙(金鴻陸) 등이 고종의 커피잔에 아편을 넣었다고 하는 김홍륙 독차사건(金鴻陸毒茶事件)이 발생하자, 독립협회는 황국협회와 함께 만민공동회를 열고 진상 규명과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홍륙은 재판도 받지 않고 종신 유배에 처해졌고, 그 연루자는 고문을 당하였다. 이와 아울러 신기선(申箕善) 등 수구파는 김홍륙 반역사건이 일어난 것은 형법이 너그럽기 때문이라며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던 노륙법과 연좌법의 부활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노륙법, 연좌법의 부활을 격렬히 반대하며 이를 저지하였다. 독립협회는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3차례에 걸쳐 홍범14조의 준행(遵行)을 주장하고 김홍륙 독차사건 발생과 관련자 고문의 책임을 물어 신기선, 이유인(李裕寅), 심순택(沈舜澤), 윤용선(尹容善), 이재순, 민영기, 심상훈 등 7대신 파면과 노륙법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를 고종에 올리며 농성하였다.
이에 10월 11일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를 수용하여 7대신을 해임하고 박정양을 서리의정사무에, 민영환(閔泳煥)을 군부대신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이로써 박정양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10월 15일 정부 대신들과 독립협회 대표들이 만나 협상하였는데, 여기에서 대표들은 잡세(雜稅)의 혁파와 중추원 재조직을 요구하였다. 이들이 제시한 중추원 개편안의 내용은 중추원을 의회로 재편하고, 그 의원의 절반은 관선(官選), 나머지 절반은 민선(民選), 즉 독립협회에서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요구에 대하여 정부 대신들은 긍정적 태도를 취했으나,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은 독립협회의 비판을 받고 있던 조병식과 윤용선을 재기용하였고, 10월 20일에는 독립협회의 토론과 집회를 제한하는 조칙을 내렸다. 독립협회는 이에 반발하여 시위함으로써 고종으로 하여금 조칙(詔勅)을 번복, 철회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10월 28일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 대회장으로 선출된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황제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정부와 협력하여 점진적 내정 개혁을 추진한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 조건을 선언한 것은 정부와 황제, 외국인의 의구심을 풀고 관민공동회를 성공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튿날 10월 29일 오후 2시 종로에서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전‧현직 정부 관료와 각종 단체, 학생, 시민이 합석한 가운데 「헌의6조(獻議六條)」를 채택하였다. 「헌의6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외국인에게 의부(依附)하지 아니하고 동심 합력하여 전제황권(專制皇權)을 견고케 할 사. ② 광산 · 철도 · 매탄(煤炭)[석탄] · 삼림 및 차관(借款) · 차병(借兵)과 모든 정부와 외국인과의 조약(條約)의 일을 만일 외부대신과 중추원의장이 합동으로 서명 날인한 것이 아니면 시행하지 못할 사. ③ 전국 재정은 어떠한 세(稅)를 물론하고 모두 탁지부(度支部)에서 구관(句管)하되 다른 부(府) · 부(部)와 사회사(私會社)는 간섭할 수 없고, 예산과 결산은 인민에게 공표할 사. ④ 지금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중죄범은 공개재판을 행하되 피고가 충분히 설명하여 마침내 자복한 후에야 시행할 사. ⑤ 칙임관(勅任官)은 대황제폐하께서 정부에 자순(諮詢)하여 그 과반사를 따라서 임명할 사. ⑥ 장정(章程)을 실천할 사.
10월 31일 고종은 「헌의6조」에 대한 답변으로 「조칙5조」를 내렸다. 그런데 「헌의6조」에서 제1조에 명시된 ‘전제황권’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독립협회와 고종의 입장에는 차이가 있었다. 독립협회 주도층으로서는 황제가 인민에 대한 전제권을 갖고 국정 운영을 하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은 무제한적인 전제권이 아니라 자신들을 통한 ‘민의’의 수렴과 동의 하에서 행사되는 권력이어야 하였다.
아울러 제6조의 '장정을 실천할 것'에서 장정이란 갑오개혁 이후 제정 공포한 각종 의안들과 「홍범14조」 및 신식 법령들을 의미하였고, 대체로 국왕 권력의 자의적 사용을 제한하는 것들이었다. 요컨대 독립협회가 건의한 「헌의6조」는 자주권의 상징 및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서 황제권의 강화를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중대사를 중추원과 협의하도록 규정하여 황제나 정부의 독단이나 전횡을 제도적으로 견제하고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1월 2일 관민공동회는 총대위원 3명을 선정해 정부에 공한(公翰)을 보내 독립협회가 제의했던 중추원 개편안에 대한 황제의 재가를 요청하였다. 이틀 후 11월 4일 독립협회의 개편안을 수용한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전문 17조, 의관(議官) 50인 중 관선 25명, 민선 25명을 규정]를 고종으로부터 재가를 받아 공포하는 동시에 독립협회에 25명의 의관 명단을 통보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개편된 중추원을 기반으로 국정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확대하게 될 것을 우려한 조병식,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 등 수구파 관료들은 중추원 관제가 반포된 같은 날 11월 4일 익명서(匿名書) 사건을 일으켰다. 그 내용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삼아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고 모함하는 것이었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를 비롯한 모든 협회를 해산하라는 조칙을 발표하고, 이상재, 남궁억, 정교 등 독립협회 지도부 20명에 대한 체포령을 내려 그중 17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체포된 자들은 이상재, 방한덕(方漢德), 유맹(劉猛), 정항모(鄭恒謨), 현제창(玄濟昶), 홍정후(洪正厚), 이건호(李建鎬), 변하진(卞河璡), 조한우(趙漢禹), 염중모(廉仲謨), 한치유(韓致愈), 남궁억, 정교, 김두현(金斗鉉), 김귀현(金龜鉉), 유학주(兪鶴柱), 윤하영(尹夏榮) 등이었다. 윤치호, 최정덕(崔廷德), 안영수(安寧洙) 세 사람은 은신하여 구속을 피하였다. 또한, 「헌의6조」에 서명한 박정양, 서정순(徐正淳), 이종건, 김명규(金明圭), 고영희(高永喜), 권재형 등 대신들을 모두 파면하고 대신 조병세(趙秉世), 조병식, 민종묵(閔種默), 심상훈 등을 등용하였다.
지도부 체포를 피해 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집으로 피신한 윤치호는 양홍묵, 이승만(李承晩) 등을 통해 대중 시위를 조직하였다. 이때 독립협회의 활동 간부가 아닌 윤시병(尹始炳), 임병길(林炳吉) 등이 만민공동회 활동에 적극 개입하였다.
서울 시내 학생들과 시민들은 경무청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병식 등은 병력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하려 했으나 미국, 영국 공사는 정부 측 무력 행사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결국 11월 10일 고종은 조병식 등을 해임하고 구속자 전원을 석방하여 독립협회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종로로 장소를 옮겨 11월 11일부터 22일까지 5차례 상소를 통해 「헌의6조」와 「조칙5조」의 실시, 조병식 ‧ 민종묵 등의 처벌, 독립협회의 복설(復設)을 주장하였다. 이에 고종은 중추원 관제를 개정하고, 역둔토(驛屯土)를 탁지부 관할 아래로 옮기는 등 「헌의6조」에 대한 부분적 이행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11월 21일 보부상을 동원해 만민공동회 습격을 꾀했는데, 이것은 시민들의 대대적 반발을 촉발하였다. 이들은 보부상에 반격을 가하고 이기동 등 수구파 관료들의 집을 파괴하는 한편, 고종의 조칙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된 관료들에게 돌을 던지고 폭행을 가하였다.
고종은 한성 주재 외국 공사들에게 병력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진압하는 방법을 문의하였다. 이들의 반응이 좋지 않자 고종은 결국 조병식, 민종묵 등 수구파 대신들을 경질하고 윤치호를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하는 등 친미파 관료들을 대거 기용하고 독립협회의 복설을 명하여 민심 수습에 나섰다. 윤치호는 집회가 과격화됨으로써 외국 공사들의 지지를 잃고 정부에 탄압 구실을 제공할 것을 염려하여 만민공동회에 자진 해산을 설득하였고, 11월 24일부터 2일간 해산하는 결정을 끌어냈다.
고종은 표면적으로는 만민공동회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보부상 해산 불응을 방조하였고, 조병식 등에 대한 체포를 늦추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다. 약속된 조치 이행이 미흡하다 여겨지자 11월 26일 만민공동회가 재개되었다.
영국, 미국 공사들은 독립협회에 대해 정부와 타협해 계몽단체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고, 고종에게도 독립협회와 타협할 것을 충고하였다. 이에 고종은 직접 나서 설득하는 친유(親諭)를 행하였다. 윤치호, 이상재,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高永根) 등은 독립협회의 복설, 대신의 택임(擇任), 보부상 혁파, 법령을 규정대로 실시할 것, 조병식 · 민종묵 · 유기환 · 이기동 · 김정근(金禎根) · 홍종우(洪鍾宇) · 길영수(吉永洙) · 박유진(朴有鎭)의 처형 등 5개 조건을 재차 요구하였다. 고종은 5번째를 제외한 나머지를 수용하였고, 이로써 독립협회는 복설되었다.
11월 29일, 고종은 만민공동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뜻으로 중추원 관제를 실시하기 위하여 중추원 의관 50명을 선임하였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소속 회원으로 의관에 임명된 자는 17인에 불과하였다. 이에 앞서 12일 수구파 관료들은 중추원 관제를 재개정해 공포하였다. 인민협회에 의한 민선 의관 선출제도의 삭제, 중추원의 자문권을 제외한 입법권 등 모든 의회 기능의 폐지, 독립협회의 의관 선출 삭제 등을 골자로 하였다. 아울러 고종과 수구파 관료들은 중추원 의관 2/3를 임명하여 중추원을 의회가 아니라 정부의 자문기관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2월 4일에는 민영환, 박정양뿐만 아니라 심상훈, 민영기, 박제순(朴齊純) 등을 내각에 등용하였다.
그러나 12월 6일 독립협회 내의 급진파 정교, 고영근, 최정덕(崔廷德), 이승만 등은 윤치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5개 조건의 즉각 실천을 요구하였고, 이로부터 20여 일 간 만민공동회를 계속하였다.
해당 기간 동안 이들은 무력 진압에 대응하고자 빈민 1,200여 명을 고용해 무장 경비를 맡겼고, 총대위원 100인을 뽑아 철야로 지키게 하였다. 경비 조달을 위해 서울의 대상인들에게 반강제적으로 모금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각 부(部) 문 앞에서 관리들의 출근을 방해하며 이들에게 만민공동회 참여를 강요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운동이 격화하면서 남궁억은 만민공동회에 불참하였다.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 등 언론은 관민협조론(官民協助論)을 강조하였다. 윤치호는 회장으로서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끌려다녔다. 나중에는 독립협회 대표로서 만민공동회 대표 고영근과 회담하여 부채 정리를 비롯해 사후 수습을 해야 하였다.
12월 15일부터 중추원 활동이 개시되어 부의장으로 윤치호를 선출하였다. 이튿날 12월 16일 개최된 중추원 회의에서는 정부 대신으로 적합한 인재를 투표로 선출하였는데, 민영준 · 민영환 · 이중하(李重夏) · 박정양 · 한규설(韓圭卨) · 윤치호 · 김종한 · 박영효 · 서재필 · 최익현(崔益鉉) · 윤용구(尹用求) 등 11명이 선정되었다. 이때 역모 죄인으로서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박영효를 추천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중추원의 11명 추천 속에 박영효가 들어있다는 사실은 고종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급진파의 과격한 활동은 고종과 정부 측은 물론 한성 주재 외국 공사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독립협회 내에서도 윤치호 등 온건파와 일반 시민의 공감을 잃었다. 당시 언론 또한 만민공동회가 정부와 타협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각국 공사들이 만민공동회 해산에 대하여 묵인 혹은 지지 입장을 표명하자, 고종은 12월 23일 군대와 보부상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이어서 독립협회와 지도부를 체포 ‧ 구속하였다.
이틀 후인 12월 25일 고종은 민회를 불법화한다는 11개 조의 조칙을 발포하였다. 이때 해산 당시 공격 대상이 되었던 것은 독립협회 전체가 아니라 황제권을 위협하던 박영효-안경수 계열의 권력 장악 운동 노선에 해당하였지만, 두 노선을 분리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로써 독립협회는 실질적으로 해산되었다.
이후 독립협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일본인과 미국인의 집에 피신해 있는 가운데, 회장 윤치호는 덕원감리(德源監理) 직책을 수락하였다. 1899년 1월 18일 중추원에서 모든 회를 일체 없앤다는 의견서가 통과되어 독립협회는 법적으로 해산되었다.
독립협회의 활동은 갑오개혁을 이어 근대적 제도 개혁 운동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 주도 세력은 갑오개혁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그 개혁 성과 중 상당 부분을 계승하는 입장에 있었다. 다만 갑오개혁기에 내각이 모든 실권을 장악했던 것과는 달리 황제권을 국가 통합의 구심적 존재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조선의 현실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던 기존 개혁론과 개혁 운동에 대한 반성으로서, 독립협회는 대내외적 자주 독립의 상징으로 황제를 내세우고,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관민의 통합과 그를 통한 개혁의 추진을 꾀했던 것이다. 이들이 주장했던 「헌의6조」의 1조나 중추원 개편안은 모두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은 상호 협조하고 보완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내에는 현존 권력 구조를 인정하는 가운데 정부와 협력해 내정 개혁을 달성하는 노선과 관료 중심 권력 구조 확보를 목표로 하여 쿠데타식 권력 탈취 방식을 답습했던 노선이 병존하고 있었다. 윤치호, 남궁억 등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구하려던 세력은 권력 장악을 꾀하며 과격한 대정부 활동과 박영효 소환을 시도한 안경수, 정교 등 급진파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였다. 이들 급진파의 과격한 행동은 시민의 반발, 독립협회를 암묵적으로 보호 · 지원하던 외국 공사들의 지지 상실을 초래하였고, 정부가 병력을 동원하여 탄압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특히 황제권 강화를 도모하였던 고종은 자신을 폐위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던 박영효 지지 세력에 대하여 위기의식을 느꼈고 결국 독립협회를 해산하였다. 이후 국가 체제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은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로 귀결되었다. 1899년 8월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모두 군주에게 집중시켜 전제군주권을 확립한다는 내용을 명문화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반포되었다.
독립협회는 국가 독립의 위기 속에 애국심 고취를 위해 충군애국을 내세웠다. 독립협회가 제정하고 『독립신문』에 실린 각종 애국가 가사는 충군애국을 강조하였고, 독립협회는 독립경축일(獨立慶祝日), 만수절(萬壽節) 등 국가 의례를 이용해 국기와 애국가를 보급해 나갔다. 독립협회가 개최하는 각종 행사에서는 황제에 대한 축수(祝壽)와 만세가 행해졌다.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에서도 충군애국 사상은 강조되었다. 이들이 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아울러 독립협회가 강연회와 신문 등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교양을 보급하여 민중을 계몽한 것은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국민국가 수립 운동의 내적 추진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독립협회는 역사와 언어를 강조하였다. 정교, 최경환(崔景煥) 등 독립협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대동역사(大東歷史)』를 출간하고자 하였는데, 당시 학부대신(學部大臣) 신기선이 출간을 금지시켜 1905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아울러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한글 전용으로 발행하였다. ‘조선의 글자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라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한글은 언문(諺文)에서 국문(國文)으로 격상되었다. 한편 『독립신문』은 조선시대에 국왕과 관인, 유생 등 지배층에 한정되어 사용되던 동포(同胞)라는 용어를 ‘한 나라 인민’, 즉 ‘국민’과 같은 개념으로 확대 적용하기도 하였다.
결국 독립협회가 지향한 것은 『만국공법(萬國公法)』 체제 아래 근대 국민 국가로 존립해 나가기 위하여 국민을 형성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과정에서 신분적 차별의 철폐, 노비제 폐지, 봉건적 악습 척결, 여성 교육의 필요성 등을 주장한 점도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독립협회는 조선이 청의 속방(屬邦)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당시를 생존 경쟁의 시대로 파악하면서 독립 유지를 위한 자강(自强)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아울러 대외 정세에 있어서는 열강 간의 세력 균형 유지를 통해서만 한국 독립이 유지된다고 판단하였고, 세력 균형에 바탕을 둔 중립외교(中立外交)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세력 균형의 파괴를 초래하는 적극화된 러시아의 대한 정책을 한국 주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러시아 및 그 동맹국 프랑스의 이권 강요에 직면하여 민간 차원의 반대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정부에게 반대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이처럼 외세의 내정 개입을 비판하며 러시아에 대한 각종 이권 양여를 반대한 점을 가리켜 독립협회가 국권 수호 운동을 펼쳤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압력이 강하다는 판단 하에 반(反) 러시아, 친(親) 영 ‧ 미 ‧ 일 노선을 취함으로써 본인들 의사와 관계 없이 일본 세력을 다시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아울러 독립협회는 러시아나 프랑스에 대한 이권 양여에 극력 반대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 다른 열강들에 대한 이권 양여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에 대한 경인철도(京仁鐵道) 부설권 허가의 경우 문명화할 기회이며 외자 유치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환영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협회 회원들은 열강에게 빼앗긴 이권을 조사해 대책을 강구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고, 전(前) 회장 이완용이 외부대신 재직 중 열강에 이권을 허가하였던 책임을 물어 제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각종 이권 조사를 마친 후, 보고[1898년 9월 4일]는 있었으나 실질적 대처는 없었다. 윤치호 등 지도부는 소명 기회를 주지도 않고 이완용을 제명한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편 『독립신문』은 동양 담론을 받아들여 한, 청, 일 삼국의 연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일본이 조선 독립의 은인이며, 동양 문명화의 선두라고 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에 대해 동양 삼국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인종, 글자, 풍속의 동질성을 가진 한, 청, 일 삼국이 서양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독립협회는 개혁을 통한 부국(富國)으로의 발전을 목표로 하였다.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정부가 주도하는 국민 계몽을 통한 문명화의 길이 조선이 취할 수 있는 방향이라 보았다. 동시에 인민을 개화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여기고 있었고, 계몽의 대상으로 여겼다. 인민 주권은 이들이 계몽을 완료했을 때에야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독립신문』의 논설 "하의원은 급지 안타"이다.
이 논설은 무식한 인민에게는 정치 참여를 허락할 수 없다는 독립협회의 우민관(愚民觀)을 보여준다. 독립협회가 구상한 의회 제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의원이란 하나의 관원(官員)으로서 임명권자는 황제였고, 논의된 사항은 반드시 황제에 상주하여 재가를 얻어야 시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격의 의회는 결코 인민 주권론에 입각한 대의 기구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의회와 내각의 엄격한 분리를 이뤄내고 모든 국가 정책의 의결권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사실상 의회원(議會院)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황제권에 대하여 일정한 제한을 기도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안경수 계열은 군민공치론(君民共治論)에 입각해 군주권을 제한하고 관료들의 권력 장악을 꾀하는 이전 개화파 개혁론의 연장선에 있었다. 이들은 독립협회가 단지 의회원 차원의 권력 분점을 할 것이 아니라 중추원과 더불어 내각까지도 장악하는 형태로 권력을 관료층이 독점하는 권력 개편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양쪽 계열 모두 군권(君權)과 민권(民權)의 관계를 제도적으로 확정하고자 하였지만, 헌법에 대한 구체적 구상이나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이와 같이 독립협회의 근대 국가 구상은 국가 중심적 입장에서 전개되었다. 신분제 철폐나 민권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기는 하였으나, 이들에게 있어서 민권이란 국가 권력에 비해 부차적이었다.
독립협회가 구상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경제 수립을 위해 산업 진흥과 개방 경제를 꾀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지주제를 유지, 강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상업적 농업을 통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꾀하였다. 이들은 거의 유일한 외화 획득 수단이자 해관(海關)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고 하여 미곡 수출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가졌던 반면, 양전론(量田論)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아울러 상업과 무역을 통한 부국으로의 발전을 꾀하면서 특권 상업 체제의 자유 상업 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외국 상인에 의한 상권 침탈 문제에 대해서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독립협회는 공장과 회사 설립에도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공업 육성은 한국의 자본, 기술 부족으로 시기상조라고 여겼고 서양의 기술 도입과 교육을 위한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였다. 안경수, 서재필 등 독립협회 주도층의 경우 스스로 회사 설립과 운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독립협회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적극 편입을 강조하면서 통상 확대를 주장하였다. 경제 개발의 차원뿐 아니라 국권 수호의 방안으로까지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개항장(開港場)이 증가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고, 추가 개항을 반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비난하였다. 불리한 조약이라 하더라도 이미 맺은 조약은 신의를 지켜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조약 개정을 위해서는 한국이 힘을 축적하는 것이 선결 과제이며 그때까지는 참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독립협회는 『만국공법』 체제하에서 근대 민족국가로서의 존립을 지향하였다. 이를 위해 신분제 및 봉건적 악습의 철폐를 제시하였고, 역사와 언어에 대한 관심도 고양하였다. 그런데 독립협회가 신분 차별을 두는 데 비판을 가하기는 하였으나 사대부의 사회적 주도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점, 노비제의 폐지에 대해서는 인신 매매를 금지하자는 주장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 봉건적 악습의 철폐를 주장하는 가운데 전통적 가치를 전적으로 무시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독립협회는 기본적으로 민중을 정치 의식과 정권 담당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로 간주하였고,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하는 개혁의 묵시적 동조자, 추종자로서의 가능성만 기대하였다. 이를 위해 교육이 필요하지만, 근대적 교육을 받더라도 현 권력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1894년 농민 전쟁으로 표출된 민중의 변혁 의지나 의병(義兵)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