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회장은 이원긍이었으며, 1906년 이준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국민교육회 임원과 회원들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1902년 개혁당(改革黨) 운동, 1904년 결성된 보안회(保安會) · 협동회(協同會) 등에서 활동하였던 인사들이 주를 이뤘다.
또한, 일부 회원들은 황성기독교청년회,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 등 기독교 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국민교육회는 국민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학교 설립과 교과서 편찬에 힘을 기울였다. 1905년 8월 보통학교 보광학교(普光學校), 1906년 9월 보통학교 한남학교(漢南學校)를 설립하였고, 1905년 12월에는 교육을 담당할 교사 양성을 목표로 국민사범학교(國民師範學校)를 설립하였다.
국민교육회가 저술, 편찬한 교과서로는 1906년 『 초등소학(初等小學)』,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 『신찬소물리학(新撰小物理學)』이 있고, 1907년 『초등지리(初等地理)』, 『신찬소박물학(新撰小博物學)』 등이 있다.
학교 설립과 교과서 편찬 외에 각계 인사들을 회관으로 초청해 ‘생명 재산 보호’, ‘교육 발달’, ‘민지(民智) 개발’ 등을 주제로 정기적으로 연설회나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회관 내에 법학 강습소를 세워 근대법에 관한 교육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국민교육회는 정치 운동을 배제하고 교육 계몽을 주목적으로 삼았으나, 1905년 9월부터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에 일본인 교사를 배치하고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려고 계획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1905년 11월 일진회(一進會)가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에 찬성하는 합방청원(合邦請願)을 하자, 회장 이원긍의 명의로 반대 의사를 밝혔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준, 전덕기 등은 상동교회에서 대책회의를 열고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연명 상소를 하기로 결정하고, 대한문 앞으로 나아갔으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906년 12월 2일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자결한 칠충신(七忠臣) 추도회를 개최하여 다시 한 번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사를 밝혔고,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 후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려 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서울 시내 도처에서 여러 단체와 함께 연설하여 시위대를 고무시켰다.
국민교육회는 비정치적 교육 계몽을 주목적으로 설립된 교육 단체였지만, 일제의 식민 교육 정책, 을사늑약, 고종의 강제 퇴위 등에 반대하며 국권 회복을 추구하였다.
회장 이준이 참여한 헤이그특사사건 이후 단체 유지가 어렵게 되면서 1907년 말경 유길준(兪吉濬)이 설립한 흥사단(興士團)에 흡수되어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