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탁사(濯斯). 충청북도 제천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중 『영환지략(瀛環志略)』 등의 서적을 읽고 서양문화의 발달상과 그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임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부패상에 분노를 느끼고 사회개혁운동에 관심을 두던 중 1888년(고종 25) 선교사 존스(Jones ,G. H.)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배재학당의 한문교사가 되면서 선교사들과의 교제를 가졌다.
1893년 세례를 받고 정동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성서번역위원 및 독립협회 간부, 제국신문 주필, 신학월보 편집인 등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독립신문』·『조션그리스도인회보』·『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에 개화사상 및 정치개혁사상을 역설하는 문필가로서 활동하였다.
1902년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담임할 수 있고 등단설교(登壇說敎)를 할 수 있는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정동교회의 창설자인 아펜젤러(Appenzeller, H. G.)가 해난사고로 사망하자 곧 담임목사직을 이어받아, 1903년부터 1914년까지 목회활동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신학활동에도 몰두하여 『신학월보』에 「셩산유람긔」·「죄도리」·「사교고략 四敎考略」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YMCA운동에도 참여하여 종교부위원장 및 전국삼년대회의 대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인천·서울 지방의 감리사로서 교회행정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시기에 『만종일련』이 출판되어 1912년에 간행된 『성산명경(聖山明鏡)』과 함께 주저로 꼽히게 되었다. 1922년 은퇴 후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사망할 때까지 비교종교론과 동양사상을 강의하였다.
해박한 한학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동양의 여러 종교를 이해하였으며, 특히 한국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의미와 위치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신학사상이 지닌 중요성은 한국의 재래종교와 기독교사상의 접합점을 선구자적으로 모색한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