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헌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정동제일교회 담임 목사 겸 신학자, 언론인, 정미의병 선유사로 활동하였다.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정동교회를 담임하여 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목회 활동뿐만 아니라 근대적 선각자로 한말 언론인,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농상공부 관료, 대한제국 선유사로 충청남도에 파견되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유사로 파견되어 정미의병과 백성의 실태를 보고한 부분은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지만 보고문 자체가 소중한 역사 자료란 의의가 있다.
최병헌의 호는 탁사(濯斯)이며, 충청북도 제천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가난 속에서도 주1을 공부하고 과거(科擧)를 준비하던 중 주2, 『사기』, 주3같은 역사서나 지리서를 읽고 세계관과 식견을 넓혀 갔다. 그러던 중 가난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22세 되던 해인 1879년, 서울의 양 직래공의 양자로 주4. 한때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충청북도 보은으로 가족을 거느리고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서울 정동에 거주하면서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부패와 과거의 부정을 적나라하게 체험하고 분노를 느껴 사회개혁을 꿈꾸던 가운데 관리가 되기를 포기하고 기독교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 우연히 1888년(고종 25), 선교사 조지 존스(G. H. Jones) 목사의 한국어 선생이 되면서 외국의 선교사와 인연이 닿았다. 이후 5년간 기독교 서적을 탐독한 후 유학을 접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아펜젤러(Henry Gerhard 주5를 만나 배재학당(培材學堂)의 한문 교사가 되면서 근대 의식을 접하게 되고 협성회(協成會)를 통해 이승만(李承晩) 등의 청년 지식인들을 지도하면서 이들과의 교제도 이어갔다.
1893년, 조지 존스 목사에게 세례(洗禮)를 받고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의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성서번역위원과 독립협회(獨立協會) 간부, 제국신문(帝國新聞)과 황성신문(皇城新聞) 주6, 신학월보(神學月報) 편집인 등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독립신문』 · 『조션그리스도인회보』 · 『대한매일신보』 · 『황성신문』 등에 개화사상(開化思想) 및 정치 개혁 사상을 주7 언론인, 주8로서 활동하였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가 되어 관리로서의 일과 전도사의 일을 겸업하였다. 이때 대한제국의 태동과 정부의 움직임을 체험하면서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정부의 외교와 정치적 일을 개인적으로 세세히 기록하여 자신의 주9에 소상히 한문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전도사가 된 이후에는 주로 아펜젤러 목사를 돕는 한국인 주10 역할을 감당하여 본격적인 주11 활동을 익혔다. 1902년, 목사 주12를 받으면서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등단 설교자(登壇說敎者)가 되어 한국인 최초의 감리교(監理敎) 설교자 중 1명이 되었다. 정동교회의 창설자인 아펜젤러 선교사가 해난 주13로 주14, 그를 이어 정동교회의 실질적 임시 담임 목사직을 수행하다 1903년부터 1914년까지는 정식 담임 목사로서 목회 활동을 하였고 약 10년 동안에 비약적인 교회 발전을 가져왔다.
이때 목회 활동뿐만 아니라 신학(神學) 저술 활동에도 몰두하여 『신학월보』에 「셩산유람긔」 · 「죄도리」 · 「사교고략(四敎考略)」 등의 논문 형식의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기독교청년회(YMCA)운동의 전신(前身)인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창립에도 참여하여 종교 부장 및 전국 3년 대회의 대회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인천 · 서울 지방의 한국인 최초 주15로서 교회 행정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활동에서 주목할 부분은 1907년에 대한제국 순종(純宗) 황제로부터 부여받은 주16 활동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으로 야기된 항일의병은 을사년(1905년)을 거쳐 정미년(1907년)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이에 순종 황제와 이완용(李完鎔) 어용 정부는 선유사란 이름으로, 항일의병들을 주17 해산케 할 목적으로 정부 관리를 2차례에 걸쳐 파견하였다. 하지만 선유사로 파견된 관리들은 의병(義兵)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오히려 반발심만 증폭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이에 정부는 주18으로 백성들로부터 주19가 있거나 주20이 두터운, 기독교 지도자를 선유사로 임명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의병의 실태를 파악하고 해산을 종용케 하고자 하였다. 지명된 대표적 인물이 장로교(長老敎)의 길선주(吉善宙), 서상륜(徐相崙)과 감리교의 최병헌, 송기용 등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활동한 이는 길선주를 제외한 세 사람이었다.
최병헌의 선유활동은 1907년 12월 25일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충청남도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그의 주요 행적은 조치원(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지역)→ 연기군(燕岐郡)→ 공주군(현, 공주시)→ 회덕군(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 지역)→ 진잠군(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지역)→연산군→ 계룡(鷄龍)→ 논산(論山)→ 석성군(현, 충청남도 부여 지역)→ 부여군(扶餘郡)→ 정산군(현, 충청남도 청양 지역)→ 청양군(靑陽郡)→ 대흥군(현, 충청남도 예산 지역)→ 예산군(禮山郡)→ 온양군(현, 충청남도 아산 지역) 등으로 충청남도의 각 군을 순회하며 주21. 그리고 그 외 목천(현, 충청남도 천안 지역), 직산(현, 충청남도 천안 지역), 평택(平澤), 아산(牙山), 임천(현, 충청남도 부여 지역), 흥산, 한산(현, 충청남도 서천 지역), 서천(舒川), 비인(현, 충청남도 서천 지역), 남포(현, 충청남도 보령 지역), 보령(保寧), 오천, 결성(현, 충청남도 홍성 지역), 전산, 홍주(현, 충청남도 홍성 지역), 면천(현, 충청남도 당진 지역), 당진(唐津), 해미(현, 충청남도 서산 지역), 덕산(현, 충청남도 예산 지역), 서산(瑞山), 태안(泰安), 전의(현, 세종특별자치시 지역), 천안(天安)을 거치거나 사정을 확인하여 고시문을 통지하였다.
최병헌은 책임을 맡은 충청남도의 거의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지역에서 들은 의병과 의병을 빙자하여 횡포를 부리는 자들에게 조칙문, 주22, 고시문을 보내어 주23 하고 청원서와 보고문을 정부 총리대신(總理大臣)인 이완용 앞으로 올려보냈다. 의병들은 신망이 두터운 최병헌도 처음엔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그도 정부에서 내려보낸 첩자이거나 해산을 권유하러 내려온 관리쯤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그의 선유 보고문이나 권고문, 효유문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최병헌은 본업에 충실할 뿐 아니라 지방민의 현실적 참상을 보고 백성의 나아갈 길은 교육을 통한 주24의 방법밖에 없음을 역설하였다. 이 또한 그의 ‘대중민 연설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중들은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였다.
기독교 지도자 선유사 가운데서 선유활동 보고문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일일이 보고하여 자료로 남긴 이는 최병헌이 유일하다. 그의 선유 보고문은 귀한 역사자료로 활용된다.
1922년에 최병헌이 쓴 『만종일련(萬宗一臠)』이라는 비교 주25 관련 서적이 출판되어 1912년에 간행된 『성산명경(聖山明鏡)』과 함께 주된 저서로 꼽히게 되었다. 특히 『성산명경』은 최초의 근대소설로도 평가받는 명저가 되었다. 1922년 은퇴 후,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사망할 때까지 신학과 비교 종교론, 동양사상을 강의하였다.
해박한 한학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동양의 여러 종교를 이해하였으며, 특히 한국의 역사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의미와 위치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신학 사상이 지닌 중요성은 한국의 재래종교와 기독교 사상의 접합점을 선구자적으로 모색한 것으로 최초의 토착 신학자란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서양의 기독교 사상을 동양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하여 이를 알기 쉽게 전파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