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 ()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안성, 평택, 충청도 천안, 진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안성, 평택, 충청도 천안, 진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
경기도 서남단 해안가에 위치한 시.
정의
경기도 서남단 해안가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안성시, 서쪽은 해안가에 면하고 남쪽은 아산시와 천안시, 북쪽은 오산시·용인시·화성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9'∼127°46′, 북위 36°54′∼37°08′에 위치한다. 면적은 454.47㎢이고, 인구는 50만 4221명(2019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4개 읍, 5개 면, 13개 행정동(23개 법정동), 411개 행정리(83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평택시 비전동에 있다.

자연환경

약간의 구릉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동쪽에는 무봉산(舞鳳山, 209m)과 백운산(白雲山, 191m), 서쪽에는 덕지산(德智山, 138m), 봉화령(烽火領, 112m), 남부에는 고등산(高等山, 158m), 마안산(馬安山, 113m), 중앙에 무성산(武城山, 112m), 오봉산(五峰山, 112m), 바람산(183m) 등 100∼200m급의 낮은 구릉이 곳곳에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를 흐르는 황구지천(黃口池川)과 진위천(振威川)이 합류, 평택의 주천인 안성천(安城川)에 흘러 들어간다. 안성천은 서남류하면서 직교천, 대방천을 합류하면서 아산호로 흘러들어 간다. 북쪽에는 발안천이 서남류하면서 하안평야를 만들고 있다.

남양만과 아산만에 접해 있는 해안선은 출입이 심하고 매우 복잡하다. 과거에는 홍수 때에 황해안의 밀물이 몰려와 넓은 저습지를 만들었으나 남양만방조제 그리고 1973년 아산만 방조제를 만든 뒤로는 전 지역이 전천후 농경지로 변하였다.

지질은 대부분 화강암질 편마암이고 진위천변에는 제4기 충적지가 발달되어 있으며 기반암의 침식으로 구릉지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토양은 적황색토, 회색토, 충적토 등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연평균기온 12.3°C, 1월 평균기온 -2.5°C, 8월 평균기온 26.4°C이며, 연강수량은 1,054㎜로 매우 적다.

역사

고덕면 방축리·오성면 양교리·팽성읍 등지에서 간돌칼·주먹도끼·돌화살촉·돌칼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팽성읍 추팔리 뒷산을 비롯하여 시내 무봉산·부용산·내리산 등지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유습은 선사시대 이래의 전통과 관련되는 것으로 믿어진다.

삼한시대에는 팽성 지역은 신분활국(臣濆活國)에, 진위(振威) 지역은 목수국(牟水國)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한 후기에 마한의 영토가 한강 이남으로부터 충청·전라도에까지 확장됨에 따라 이 지역은 직산·성환과 함께 마한의 목지국(目支國)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북은 고구려, 남은 백제 땅으로서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이에 대항한 백제와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아산현읍지(牙山縣邑誌)』에 의하면, 아산 일대는 백제 아술현(牙述縣)에 속했다고 나온다. 팽성 일대 역시 백제 아술현에 속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 영역에 편입되어 부산현(釜山縣)·부성현(釜城縣)으로 불렸고, 금산(金山)·송촌활달(松村活達)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이 지역에는 북으로 연달부곡[淵達部曲: 지금의 진위]이 있었고, 중간부에는 송장부곡[松莊部曲: 지금의 송탄동 장안마을 일대]·천장부곡[川場部曲: 지금의 서탄면 서부]·백랑부곡[白浪部曲: 지금의 팽성읍 서남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진위 서부에는 용성현[龍城縣: 지금의 안중읍 용성리]과 광덕현[廣德縣: 지금의 현덕면 광덕]이 있었는데, 용성현은 고구려 때 차홀현(車忽縣)이라 불리던 곳이다.

옛 평택현은 삼국시대에는 하팔현이라 불려졌는데, 그 연혁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팔현(河八縣)은 하입현[河入縣: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현]의 오기(誤記)로 보기도 한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 전국에 9주를 두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부산현은 진위현으로, 하팔현은 팽성현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진위현은 한때 수성군(水城郡)에 영현(領縣)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용성현도 차홀현으로 개칭되고 당은군[唐恩郡: 충청도]에 속현이 되었다.

이 지역은 본래 4세기 중반까지 백제의 영토에 속했으나 5세기에는 고구려에, 그리고 다시 6세기 중반에는 신라에 속할 만큼 인근 지역인 안성·화성과 함께 삼국 정립기에 격전지로 전해온다.

940년(태조 23) 팽성현을 평택현으로 개칭하여 천안부에 속하게 하였다. 그리고 진위현은 수주(水州)의 속현이 되었다. 또한 청북면 지역은 용성현, 현덕면 덕목리 일대는 광덕현, 동삭리 일대는 영신현[永新縣, 또는 영풍현(永豊縣)]으로서 1018년에 또한 수주에 속현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군 침입 때 왕이 난을 피해 남으로 몽진했는데, 다음 해 환궁할 때 마침 병환이 나자 이곳 진위의 가관(假館)에서 치료를 받고 귀경한 적이 있었다.

고려 중기 이후 5도·양계가 성립되면서 1009년(목종 12)에 모두 양광도[楊廣道 또는 충청도]에 소속시켰다. 그 뒤 1172년(명종 2) 진위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가, 뒤에 속현에서 벗어나 현령관(縣令官)이 두어질 만큼 승격되었다.

고종 때에는 진위현에서 이장대(李將大)·이당필(李唐必)이 정국병마사(靖國兵馬使)를 자칭하고 봉기했으나, 1218년(고종 5) 관군에게 토평되었다. 고려 말의 충신 공은(孔隱)은 조선 태종으로부터 수차 새 왕조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끝내 불응하고 현덕면에 은거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이 지역의 북쪽은 진위현, 서쪽은 수원군의 속현으로 있었다. 그리고 동서쪽은 일부가 양성현에, 동남쪽은 일부가 직산현에 속해 있었다. 중앙부는 영신현이 되었다가 폐현되었고, 그 뒤에는 또한 평택현과 진위현으로 분립될 만큼 행정구역상 복잡한 변동이 있었다.

1398년(태조 7) 충청도에 속했던 진위현을 경기도에 이속시키면서 현령을 두고, 1413년(태종 13)에는 현감을 두었으나, 평택현은 그대로 충청도에 남아 있었다.

1424년(세종 6)에 진위현과 분속되었던 송장현이 1433년 다시 진위현에 합속되었다. 평택 중부에 수원부의 속현으로 영신현을 두었던 것은 견아상입(犬牙相入: 개 이빨이 서로 엇갈려 있는 모습)이라는 제도를 따른 것이라 한다.

1505년(연산군 11) 경기도로 환원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에 편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섬멸하지 못했다는 책임으로 1596년(선조 29) 직산현에 이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평택현으로 복구되었다.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낸 원균(元均)이 진위 출신인데다가, 당시 왜군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의식, ‘송(松)’자 있는 고을을 피하라는 지시로 송장면 지역에서는 전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소사동 일대의 소사벌전투는 임진왜란 때 명군과 왜군의 대회전으로 왜군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면서 참패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 휘하의 해생(解生)·나귀(玀貴)·양등산(楊登山) 등은 기병 4,000명을 인솔하고 말탄 원숭이부대를 소사천다리 밑에 매복시켰다가 직산까지 북상한 왜군의 선봉부대를 기습하여 큰 타격을 가했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 당시 이 고장은 또다시 청·일 양군의 격전지가 되었다. 곧 청군의 주력과 이천·서울 등지에서 남하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소사벌 전투가 그것이다.

지금도 몰왜보(沒倭洑)는 일본군이 잠복했던 곳이며, 청망평(淸亡坪)은 청군이 일본군에게 패배했던 들판으로 그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진위읍지』에 따르면, 진위현은 1891년(고종 28) 당시 13개면, 2,256호에 인구가 1만 400인 가량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1895년 전국을 23부로 나누어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진위군과 평택군으로 바뀌어 공주부(公州府)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로 개편되면서 진위군은 4등군으로 경기도에, 평택군은 충청남도에 각각 속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충청남도의 평택군 전역과 수원군의 토진·수북·청룡·감미·율북·포내·현암·승량·안외·광덕·가사·종덕·오타·숙성·언북·오정면 등 16개 면과 양성군 승량원면의 5개 리, 양성면의 4개 리, 원당면의 4개 리, 구룡면의 5개 리, 영통면의 1개 리, 용인군 서촌면의 1개 리, 직산군 삼서면의 2개 리를 진위군에 병합, 11면 128개 리로 개편 되었다.

1926년 군청 소재지 병남면을 평택면으로 개칭하고, 송장면과 탄현면을 합해 송탄면을 신설하였다. 1938년 진위군이 현재의 평택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이듬해에 평택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2년 6월 15일 송탄면에 신장출장소(新場出張所)가 설치되었고, 이듬해 송탄면이 읍으로 승격된 뒤, 1981년 7월 1일 송탄읍이 시로 승격되어 평택군에서 분리되었다. 1967년 부용면과 서면을 합해 평택의 고호를 따서 팽성면으로 개칭했고, 1972년 9월 1일 팽성면에 안정출장소가 설치된데 이어 1979년 팽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9년 5월 1일 평택읍에 중부·동부·서부·북부의 4개 출장소를 두었고, 1983년 2월 15일에는 안성군 원곡면의 4개 리, 공도면의 소사리를 평택읍에, 용인군 남사면의 일부가 각각 진위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1월 1일 평택읍이 급속한 산업화로 인구의 팽창과 행정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시로 승격되었다.

1987년 서탄면 적봉리가 송탄시에 편입되고, 화성군(현 화성시) 양감면 고념리가 청북면에 편입되었다. 1989년에는 4월 1일 안중출장소가 안중면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4월 20일 진위면의 3개 리가 오산시로 편입되었으며, 같은 해 5월 10일 도농통합에 따라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이 통합, 새로운 평택시가 되었다.

1996년 4월 19일에 동부동을 송탄동으로 변경하였고, 1997년 4월 26일 진위면 갈곳리를 진위면 갈곶리로, 청용동을 청룡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해 6월 17일 현덕면 인광5리가 인광5·6리로 분리 조정되었고, 1998년 10월 1일에는 송탄동과 도원동을 합하여 송탄동으로 변경하였다. 2002년 11월 5일에 안중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2006년 12월 29일 포승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16년 청북면이 청북읍으로 승격되었다.

유물·유적

선사 유물로는 고덕면 방축리, 오성면 양교리, 현덕면 도대리, 팽성읍 두정리 등 여러 곳의 선사유적지에서 간돌칼·민무늬토기·석기·화살촉 등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성지로는 진위면 견산리의 성산토성지, 팽성읍 안정리의 농성(경기도 기념물, 1981년 지정), 안중읍 용성리토성지, 덕우리의 자미산성지(紫0xF471山城址), 현덕면 덕목리토성지, 청북읍 옥길리의 무성산성지(武城山城址), 고덕면 방축리토성지가 있으며, 포승읍 원정리에 봉수대가 있다.

주요 불교문화재로는 현덕면 덕목리의 심복사에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72년 지정), 진위면 동천리 무봉산(舞鳳山) 기슭의 만기사에 만기사철조여래좌상(보물, 1972년 지정), 안중읍 용성리의 약사사지에 약사사부도(藥師寺浮屠)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팽성읍 객사리의 평택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와 진위면 봉남리의 진위향교대성전(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가 있다. 그리고 팽성읍 함정리 서원말에 있는 포의사(褒義祠)터는 1663년(현종 4)에 세워졌던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의 3학사를 배향하던 곳이다.

이외에 안중읍 학현리의 김효자정문, 청북읍 덕우리의 박효자비, 서소리의 오효자비, 진위면 가곡리의 이씨효열비, 현덕면 장수리의 김효자비, 죽백동의 허국효행정문 등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로 활동했던 원릉군 원균의 선무공신교서(보물, 1992년 지정), 진위면 은산리의 삼봉집목판본(경기도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 등이 있다.

고건축으로 팽성읍객사(경기도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 팽성읍 본정리의 홍학사비각(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고덕면 두릉리의 안재홍생가(경기도 기념물, 1992년 지정), 팽성읍 본정리의 홍익한의 비각인 포의각(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등이 있다. 또한 진위면 은산리의 정도전사당(鄭道傳祠堂), 서탄면 금암리의 한온충신사당(韓薀忠臣祠堂), 도곡동의 수성군 최유림사당, 이충동의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비를 보존한 충의각(忠義閣), 청북읍 고잔리의 신숙주 영정 및 감실주독 등이 있다.

묘로는 도일동의 원균장군묘(경기도 기념물, 1980년 지정), 포승읍 희곡리의 이대원장군묘(경기도 기념물, 1980년 지정), 팽성읍 본정리의 홍익한묘, 포승읍 원정리의 류처사묘 등이 있다.

기념비로는 조선 후기 대동법 실시에 앞장선 김육(金堉)과 관련된 소사동의 대동법시행기념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와 비석동의 현충탑, 비전동의 반공탑, 용이동의 남아연방공화국 참전비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평택농악(국가무형문화재, 1985년 지정)·꼭둑각시놀음(국가무형문화재, 1964년 지정)·서각장(경기도 무형문화재, 2004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수덕사·방한사 등의 사찰, 오달제유지, 병남단오행사, 소사벌백중놀이, 유상순효자정문 등의 문화유산과 도일동의 엄나무·느티나무·향나무·물푸레나무·모과나무·팽나무, 오좌동의 은행나무·향나무, 장당동의 엄나무, 모곡동의 향나무 등 여러 수종의 거수노목(巨樹老木)들이 시내 각지에 산재하고 있다.

약수로도 유명하여 송탄시 지역의 경우, 팔룡산 줄기에서 1,000년 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는 옻우물을 비롯, 불악산의 용호정과 장군정, 왕이 옥관자를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옥관자정도 유명하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평택향교와 진위향교가 있는데, 조선 초기 팽성읍 객사리에 건립된 평택향교와 조선 초기 진위면 봉남리에 건립된 진위향교(振威鄕校)가 있다. 15세 이상의 이 고장 생도들에게 학문 연구와 인격 수양의 배움터가 되어 주었다.

또한, 1661년(현종 2)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우남양(禹南陽)의 충절과 유덕을 기려 이 고장 유림이 건립된 포의사(褒義祠, 襄至書院)는 1704년(숙종 30) 사액되어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헐릴 때까지 유생들의 교육과 함께 배향된 선유(先儒)들에 대한 제향이 행해졌다.

1900년대 이후 평택에는 진흥의숙(進興義塾)·동명의숙(東明義塾)·평택서당 등과 죽림(竹林)·숙성리(宿城里)·지제리(芝制里)·양교리(梁橋里)·신대리(新垈里) 등에 서당이 설치되어 신·구교육기관으로서 후진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900년 진위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이 최초이며, 1904년 강난수(姜蘭秀)가 팽성읍 남산리의 자기집 사랑방에서 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을 실시해 오다가 그 뒤 평택보통학교로 인가되었고, 1913년에 개교한 현재의 성동초등학교가 있다.

그 뒤 죽백초등학교가 설립되고, 1922년 안중·서정 등의 초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30년에는 1면1교의 교육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송탄시 지역에는 1936년 최기봉(崔基鳳)이 사재를 털어 가재리에 교실을 짓고 직접 학생을 가르쳤는데, 광복 후 서정초등학교 분교가 되었다가, 1949년 송탄초등학교로 발전하였다. 1937년 지산리에 강습소가 설립되어 광복 전까지 이 지역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이 고장에는 초·중·고등학교가 활발히 건립되어, 어느 지방 못지않게 각급 학교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52개교, 중학교 24개교, 고등학교 21개교, 특수학교 2개교가 있으며, 국제대학교·한국복지대학교·평택대학교가 있다.

1972년에 개원한 평택군문화원, 1990년 5월에 개원한 평택시문화원이 통합되어, 향토지 발간은 물론 탄현문화제와 소사벌문화제 등 각종 문화행사를 주관하면서 향토문화의 계승·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문화단체로는 1983년 한국미술협회 평택지부, 1989년에는 문인·음악·국악·연예협회 평택지부가 각각 창립되고, 이와 함께 예술단체 연합체를 이루는 한국예총 평택지부가 새로 설립되어 평택지방 문화·예술발전에 공헌하게 되었다.

이 고장의 문예회관으로는 남부(평택)·북부(송탄)·서부(안중) 등 3곳에 공연장·전시관·세미나 시설을 갖춘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도서관으로는 서정동의 경기도립 평택도서관, 비전동의 평택시립도서관, 팽성읍의 평택시립 팽성도서관 등이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백중놀이를 들 수 있다. 백중놀이는 경기도 이남 지방에서 성행하던 놀이로 그 기원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조까지는 주로 승려들이 100가지 종자百種를 갖추어 부처님에게 재를 올리는 행사였으나, 그 뒤 일반가정에서 조상의 사당에 새로 난 음식을 올리는 천신(薦新)을 하고 춤과 노래로 하루를 즐기는 놀이로 변하였다.

백중놀이는 음력 7월 15일부터 며칠 동안 계속되는데, 이 때 농악놀이·씨름·그네뛰기·줄다리기·난장 등이 아울러 벌어진다. 남사당패의 놀이가 곁들여지기도 하여 인근 각지에서 구경오는 사람들도 많아 성황을 이루게 된다.

이곳의 백중놀이는 1945년 이전까지 성대히 거행되다가 한때 전승이 중단되었으나 최근 평택문화원 주관 아래 재연되었다.

동제로는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팽성읍 추팔리의 산신제가 유명하다. 약 500년 전부터 거행되었다는 이 산신제는 매년 음력 2월 혹은 3월 중에 말날[午日]을 택하여 밤 9시[戌時]경에 뒷산에 있는 당집에서 거행한다.

그러나 동네에 부정한 일이 생기면 5월까지 연기되기도 한다. 제일이 결정되면 사흘간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등 부정한 일이 없도록 엄격한 금기가 지켜진다.

제물로는 통돼지 한 마리를 바치며 제를 지내는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롯하여 각자의 소원을 빈다. 산신제가 끝나면 동민들은 농악을 치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 등 마을 전체가 축제분위기에 휩싸인다. 이곳 산신제는 여태껏 한 번도 중단된 일이 없다고 한다. 이 밖에도 팽성읍 내리의 산신제 등이 매년 관례에 따라 시행되고 있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는 「영웅바위전설」·「심복사전설」·「자미산성지전설」등의 지명전설이 다수 전해오고 있다. 영웅바위는 포승읍 만호리에서 서쪽으로 약 3㎞ 지점의 바다에 솟아 있는 높이 15m, 둘레 60m의 바위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얽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아산만으로 침입하자 이 바위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수군을 지휘하는 장군의 모습으로 화하였고 주변의 작은 바위들도 군졸의 모양으로 변하게 했다.

그러자 이곳에 당도한 왜군들은 자신을 향하여 돌진하는 듯한 바위의 형상에 속아 대경실색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그 뒤 사람들은 이 바위의 공을 기리기 위해 영웅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심복사는 현덕면 덕목리에 있는 절로 어부와 석불에 얽힌 유래담이 전해온다. 언젠가 아산만에서 조업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조그만 석불이 걸려 올라왔는데 어부는 그 석불을 무심코 바다에 던져버렸지만 석불은 매번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어부는 석불을 싣고 집에 돌아왔다.

그 날 밤, 어부의 꿈에 낮에 건져낸 석불이 나타나더니 자신이 안치되어야 할 자리를 일러주고는 그곳에 절을 짓되 바닷가에서 파선된 뱃조각을 거두어 쓰고 근방에 돌아다니는 검은 소 세 마리를 끌어다 일을 시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어부는 석불이 계시한 대로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바로 심복사라는 것이다.

또한, 자미산의 성지에는 오누이 힘내기형의 유래담이 전해온다. 옛날 힘이 장사인 오누이가 있어 서로 힘겨루기 시합을 했는데 오빠는 세 척이나 되는 나막신을 신고 한양까지 갔다오고 누이는 그동안 앞치마로 돌을 날라다 성을 쌓는 시합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더 걱정하는 어머니의 간섭으로 누이는 시합에 져 죽고 말았다. 그때 누이가 성을 쌓았던 자리가 바로 성터이며 오빠는 임경업(林慶業)이라 한다.

이 밖에도 가을에 단풍드는 모습으로 다음 해 농사를 점칠 수 있다는 진위면 동천리의 「은행나무전설」, 자식이 없던 노파가 백일기도 끝에 옥동자를 얻었다는 포승읍 원정리의 「느티나무전설」 등이 전해오고 있다.

이 고장에 구비 전승되는 민요는 노동요·의식요·애정요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도 노동요가 많고 노동요 중에도 논매기소리와 모내기소리가 대부분이며 밭노래는 거의 없는데 그 까닭은 이 지방이 경기도 평야의 중심지로 논농사가 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식요는 만가가 많이 전하고 지경소리는 약간 전할뿐이다. 특히, 이 지방을 대표하는 소리로는 노동요 중 「얼카뎅이야」(논매기소리)·「방개타령」(논매기소리)·「농부가」(모내기소리)·「소몰이소리」·「파랑새」(새몰이), 신앙요인 「고사반」, 여요인 「시집살이요」, 애정요인 「정요(情謠)」와 「상사요」 등을 들 수 있을 정도로 민요의 보고(寶庫)이다.

그 중 대표적인 「긴방개타령」은 “에기야∼에헤∼이/헤∼이야 방개 홍개야 논다.”가 반복되는데 가락과 가사가 모두 단조로우나 가락이 힘차며 길고 높게 뻗는데 매우 구성지다. 그리고 「얼카뎅이야」는 “이논배미를/얼카뎅이야(후렴)/얼른매고/(후렴 생략)/장구배미로/넘어갈까/장구배미를/얼른 논을 매고/…….”와 같이 얼른 매고 쉬자는 내용의 단순한 가사에 ‘얼카뎅이야’의 후렴이 사이사이 힘차게 불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애벌논맬 때 호미로 흙덩어리를 일구며 힘을 돋우는 소리를 후렴화한 것으로 가락은 단조로우나 힘차고 빠르다.

그 밖에 특색있는 것으로 「파랑새요」를 들 수가 있는데 “우여·(후렴)/금제만경 넓은 들에 오곡백곡 풍성하니/일진춘풍 일때마다 금물결이 출렁출렁/전주고목 녹두새야 아반아래 납작새야/우리논에 앉지말고 십리백리 날아가라/우여·/…….”와 같다.

‘우여·’는 새를 쫓는 후렴이고 가사는 새가 벼에 앉지 말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4음4음보가 정연한, 문학성이 높은 정형시이다.

그리고 「고사반」은 주인댁의 평안과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장편의 서사적 음영민요로 무격신앙요의 백미라 할만한 완전한 작품이다. 이 밖에 여요인 「상사요」와 「정요」도 순수한 감정의 낭만적 표현기교가 뛰어난 음영민요들이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45.5%가 농경지로 경기 지방에서 농경지의 면적이 가장 많은 지역의 하나이다. 임야는 19.6%이며, 경지 중 논 1만 5,438ha, 밭 5,234ha이다. 주요 농작물은 쌀, 두류, 서류 이 외에 밭작물로 배추·무·고추·파 등이 생산된다.

최근 주곡의 경지 면적은 계속 감소하고 있으나 과실류·목축·원예 등의 생산 면적이 늘어나고 있다. 주요 임산물은 밤·대추·도토리·표고버섯 등이 생산되고 있다.

해안가에 연해있어 민어·송어·꽃게·망등어·낙지 등이 어획되고 있다.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9.1%인 3만 7,188명이며 제조업 인구는 14.2%이다. 광산물은 고령토 등이 생산되고 주요 제조업은 식료품공업, 조립금속업, 비금속공업, 종이인쇄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상업시설은 팽성 등지에 정기 시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쇠퇴했으며, 상설 시장이 평택·팽성 등에 발달하고 있다.

교통은 고속도로, 국도 등이 동서남북으로 지나고 있어 자동차 교통이 발달해 있다.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시의 동쪽에서 남북으로 지나고 있으며 서해안고속도로가 시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2008년 11월 평택~음성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로 곧바로 연결된다. 국도 1호선이 시의 동북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2016년에는 수서와 평택을 잇는 수서평택고속선이 개통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그리고 국도 8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국도 45호선이 서남·동북 방향으로 지나며 국도 39호선이 서쪽 안중읍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철도는 경부선이 국도 1호선과 나란히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특히 서울에서 천안까지 복복선 전철이 놓이면서 평택의 교통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읍·면
  1. 팽성읍(彭城邑)

시의 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56.53㎢, 인구 2만 9310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객사리이다.

본래 충청남도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충청남도의 여러 지역을 부용면(芙蓉面) 12개 리와 서면(西面) 13개 리로 편제하고 경기도 진위군(振威郡)이라 하였다.

1938년 부용면(芙蓉面)과 서면(西面)이 병합되어 평택군 팽성면으로 개칭했고, 1979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2년에 팽성읍 서부출장소가 설치,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1995년 새로운 평택시로 되었다.

지질은 대부분이 대보화강암(大寶花崗岩)으로 이루어졌다. 중앙에서 북동부 방향으로 솟아있는 부용산(芙蓉山, 35m) 등 대부분이 해발 50m 이하의 평탄한 지형을 보인다. 북동부의 안성천이 읍계를 형성하고 중앙 북부에서 진위천과 합류하면서 굽이굽이 물줄기가 이어져 황해로 흘러든다.

서남부에는 둔포천(屯浦川)이 흐르면서 주변지대에 넓은 충적평야를 만들어 놓았다. 아산만방조제가 만들어진 이후, 진위천 유역의 평야는 바닷물의 조수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농작물로는 쌀과 콩이 주로 생산된다. 한우·젖소·돼지·닭·산양·사슴 등이 사육되는데, 특히 한우·돼지·닭은 사육두수가 시 전체에서 제1위를 차지한다. 양봉도 성한 편이며, 읍내에 정기시장이 1개 위치한다. 서해안에 인접한 지리적인 조건으로 수산물 어획량이 시 전체에서 제일 많을 정도로 어업 분야도 발달해 있다.

다양한 업종의 중소기업체가 위치해 있으나 제조업을 비롯한 공업발전은 더딘 형편이다. 추팔리와 남산리 일원의 추팔산업단지에는 섬유·음식료품·목재 등의 공업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교통은 45번 국도가 남쪽에서 북동부로 종단하며, 6·10·12·14·15번 시도가 곳곳을 연결한다.

문화유적은 객사리에 팽성읍객사·평택향교·자비사(慈悲寺), 안정리에 농성(農城), 본정리에 홍학사비각(洪學士碑閣)이 있다.

객사(客舍)·남산(南山)·추팔(秋八)·노와(老瓦)·평궁(坪宮)·신궁(新宮)·두(頭)·신호(新虎)·근내(近乃)·석봉(石峰)·원정(院井)·도두(棹頭)·함정(咸井)·신대(新垈)·본정(本井)·노성(老成)·두정(斗井)·노양(老陽)·대사(大沙)·송화(松花)·석근(石斤)·안정(安亭)·내(內)·동창(東倉)·대추(大秋) 등 25개 리가 있다.

  1. 안중읍(安仲邑)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28.47㎢, 인구 4만 250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안중리이다.

조선시대 이래 충청남도 직산군 일원이었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원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위군의 여러 면으로 나뉘어 속해 있었다.

1938년 평택군으로 이속되었고, 당시 현 안중읍 지역은 오성면·청북면·현덕면·포승읍 일원이었다. 1987년 청북면의 안중출장소가 1989년 안중면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오성면의 5개 리, 청북면의 2개 리, 현덕1면의 2개 리 일부, 그리고 포승면의 1개 리 일부를 병합하여 모두 10개 리로 편제하였다.

이때 포승면 석정리(石井里) 일부를 성해리로, 현덕면 화양리(華陽里) 일부를 현화리로, 현덕면 인광리(仁光里) 일부를 송담리로 개칭하여 3개 리를 신설하였다. ‘안중’이란 면 명칭은 품질좋은 쌀이 많이 나며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1995년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을 폐하고 도농복합형태로 신설된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2002년 11월 5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기반암은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의 편암(片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파산(琵琶山, 56m)·자미산(紫薇山, 36m)·통봉(桶峰, 32m) 등 해발 100m가 안 되는 낮은 산지가 많이 분포하나 대부분 완만한 저평지에 가깝다. 평택호로 유입되는 대반천(大盤川)이 남부와 중부를 관류하면서 넓은 충적평야를 만들었다.

전체면적 중 농경지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하며, 잘 정비된 관개시설을 갖춘 까닭에 밭농사보다는 미곡 중심의 논농사가 우세한 지역이다. 돼지·닭·산양 등을 사육하는 축산농가가 산재하며 양봉도 이루어진다. 식품분야의 제조업체가 위치하나 광공업 분야의 발전은 더딘 형편이다.

교통은 38번 국도가 면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39번 국도가 남북을 종단하면서 두 개의 국도가 면 중앙에서 교차한다. 이 외에 5·6번 시도 등 풍부한 도로망을 갖춘 까닭에 인근지역과의 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중·서부 평택시의 상업·위락·교육·의료 활동의 중심지이다.

문화유적은 용성리에 약사사(藥師寺)와 부도성지, 덕우리에 자미산성지, 안중리에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열녀정문이 있다. 안중리에 안중창(安仲倉)은 조선시대 당시 곡물집산지의 기능을 담당했던 곳이다.

안중(安仲)·학현(鶴峴)·금곡(金谷)·대반(大盤)·삼정(三井)·덕우(德佑)·용성(龍城)·성해(城海)·송담(松潭)·현화(玄華) 등 10개 리가 있다.

  1. 포승읍(浦升邑)

시의 서단에 위치한 읍. 면적 60.46㎢, 인구 2만 6740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방림리이다.

본래 수원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수원군 포내면(浦內面)의 대부분, 승양면(升良面)·안외면(安外面)·현암면(玄巖面)의 일부를 통합하여 9개 리로 구성하고 진위군 포승면이라 하였다.

면 명칭은 포내면의 ‘포’자와 승양면의 ‘승’자를 딴 데서 유래되었다. 1938년 평택군으로 이속되었다. 1989년 안중면에 석정리의 일부를 이관시켜 현재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1995년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을 폐하고 도농복합형태로 신설된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2006년 12월 면에서 포승읍으로 승격되었다.

기반암은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의 편암이다. 북서부의 봉화령(烽火嶺, 112m)이 면에서 제일 높은 산지이고, 중앙 남부에 승배산(僧拜山, 51m), 그리고 대덕산(大德山, 68m) 등 잔구형 산지가 분포한다. 나머지 지형은 충적지가 많다. 남양호가 북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며, 방림천(芳林川)이 면 전체를 관류한다. 이들 유역에 충적층과 해안평야가 자리잡고 있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훨씬 우세한 미곡 중심의 농업지대이다. 주요 농산물로 보리·콩 등의 맥류와 두류 생산량이 많고, 고추·마늘 등의 채소류 경작도 활발하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돼지·닭을 사육하는 농가가 있다. 무엇보다도 면 서부가 서해 바다에 인접해 있는 관계로 어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어업 종사인구도 현덕면 다음으로 많다.

해안에는 소규모의 염전이 산재하며 인근 연안에서 어류와 갑각류를 중심으로 다양한 어종이 어획된다. 과거에는 만호리 앞 바다에서 이른봄에 잡히는 숭어의 어란이 특산품으로 유명했다. 평택항의 개발과 함께 자동차부품 업체와 자동차조립생산공장, 철강공장, 대형플랜트공장 등 제조업체가 다수 위치해 있으며, 서해안에 인접하여 포승국가공단개발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무역입국의 미래를 선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서해안고속도로가 면 중앙을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고, 38번 국도가 남서단에서 동쪽으로 횡단한다. 그리고 평택항만진입도로가 남서부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321·345번 지방도가 통과한다. 이 외의 도로망으로 1·2번 시도 등 거미줄 같은 도로망을 자랑한다.

더욱이 1973년에 완공된 남양호방조제의 축조로 인접한 화성시와의 교통이 원만해졌다. 특히 내기리에서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 걸친 서해대교가 완공되면서 새로운 교통요지로 부각되었다. 서해안에 인접하여 포구가 특히 많았던 곳으로, 만호리는 인근 충청남도 당진·서산 등지와 연결되는 포구로 유명했다.

문화유적은 원정리에 수도사(修道寺)가 있다. 경승지로는 만호리로부터 서쪽으로 약 3㎞ 지점되는 바다 한가운데 많은 전설을 간직한 채 우뚝솟은 영웅바위가 있다.

내기(內基)·도곡(道谷)·원정(遠井)·만호(晩湖)·희곡(希谷)·신영(新榮)·방림(芳林)·석정(石井)·홍원(洪原) 등 9개 리가 있다.

  1. 고덕면(古德面)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5.06㎢, 인구 1만 212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좌교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위군의 고두면(古頭面)·오량면(五梁面)·소고니면(所古尼面)·성남면(城南面) 일부, 수원군의 종덕면(宗德面)·율북면(栗北面)·수북면(水北面) 일부, 충청남도 평택군 북면(北面)을 통합, 11개 리로 구성하고 경기도 진위군 고덕면이라 하였다.

면 명칭은 고두면의 ‘고’자와 종덕면의 ‘덕’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1938년에 평택군으로 이속되었다. 1995년에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을 폐하고 도농복합형태로 신설된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중앙의 바람산(41m) 등 구릉지가 몇 개 있으나 해발 100m가 넘는 산은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구성되어 있다. 진위천(振威川)이 서쪽 면계를 따라 길게 이어지고, 곳곳을 관류하는 두릉천(杜陵川)·마경천(馬境川)·서정천(西井川) 유역에 넓은 평야가 분포되어 있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로 미곡과 보리 등의 생산량이 많고 넓은 과수원 대지에서 나오는 배의 산출량이 주목된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돼지·오리 등의 사육이 활발하며, 양계와 양봉도 행해진다. 제조업으로는 제지·화학 분야의 업체가 위치한다.

교통 사정으로 38번 국도가 남부지역을 횡단하고, 340번 지방도가 북부를 가로지른다. 이 밖에 13·15번 시도 등의 도로망을 갖추었다. 문화유적은 두릉리에 안재홍생가(安在鴻生家)가 있다.

좌교(坐橋)·당현(堂峴)·두릉(杜陵)·문곡(文谷)·동청(東淸)·해창(海倉)·궁(宮)·동고(東古)·방축(防築)·여염(余染)·율포(栗浦) 등 11개 리가 있다.

  1. 서탄면(西炭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8.63㎢, 인구 4,16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암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위군 일서면(一西面)의 5개 리, 이서면(二西面)의 6개 리, 이탄면(二炭面)의 8개 리, 수원군(水原郡) 율북면(栗北面) 황구지(黃口池)를 통합하여 10개 리로 편제하고 진위군 서탄면이라 하였다.

면 명칭은 일서면·이서면의 ‘서’자와 이탄면의 ‘탄’자를 딴데서 유래되었다. 1938년 10월에 평택군으로 이속되었다. 1995년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을 폐하고 도농복합형태로 신설된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기반암은 반상변정질(斑狀變晶質) 편마암이 대부분이다. 면내의 최고봉인 적봉(赤峰, 76m)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평탄한 지형이다. 황구지천(黃口池川)이 서쪽 면계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흐르고 진위천이 면 중앙을 횡단하여 면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이 밖에 오산천(烏山川)·신야천(新野川)·장등천(長登川)이 면 구석구석을 흐르면서 주변지역에 충적평야를 조성해 놓았다.

경지면적이 넓은 편은 아니나 경지율이 비교적 높고, 논농사가 중심을 이루는 전형적인 지역적 특성을 나타낸다. 주요 농산물로 미곡과 두류를 중심으로 북쪽의 낮은 구릉지에서는 배의 과수농업이 성하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돼지·닭을 사육하는 농가가 있다. 전기·식품 등의 제조업체가 일부 소재하나 공업분야의 발전은 미진한 상태이다.

교통은 302번 지방도가 면 북단을 횡단하고 있고, 15·16·17번 시도가 각각 남쪽과 북쪽의 교통편의를 돕는다. 문화유적은 장등리에 보국사(輔國寺)가 있다. 사리에 안동김씨(安東金氏), 내천리에 순창조씨(淳昌趙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금암(金巖)·사(寺)·수월암(水月巖)·내천(奈川)·마두(馬頭)·회화(檜花)·적봉(赤峰)·장등(長登)·금각(金角)·황구지(黃口池) 등 10개 리가 있다.

  1. 오성면(梧城面)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2.50㎢, 인구 7,17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숙성리이다.

본래 수원군(水原郡)과 진위군(振威郡)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수원군 오정면(梧井面)·숙성면(宿城面)의 대부분, 언북면(堰北面)·포내면(浦內面)·현암면(玄巖面)·안외면(安外面)·승양면 각 일부 이, 그리고 진위군 고두면(古頭面) 일부를 통합하여 14개 리로 개편하고 오성면이라 하였다.

면 명칭은 오정면의 ‘오’자와 숙성면의 ‘성’자를 딴데서 유래되었다. 1938년 평택군으로 이속되었다. 1989년 4월에 신설된 안중면에 금곡·안중·대반·삼정·학현 등 5개 리를 넘겨주고 현재는 9개 리를 두고 있다. 1995년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을 폐하고 도농복합형태로 신설된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기반암은 주로 선캄브리아기의 편암이다. 북서부 경계에 솟아있는 오봉산(五峰山, 110m)의 자락이 면내로 뻗어있으나, 나머지 지형은 평탄한 편이다. 진위천이 동쪽 면 경계를 이루며 굽이쳐 흐르다가 평택호로 합류한 뒤, 서해안에 다다른다. 교포천(橋浦川)·대반천(大盤川) 등이 면 전체를 흐르면서 곳곳에 충적평야를 조성했고, 여기에 북서부 일대의 침식평야까지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시의 대표적인 논농사지대로서 미곡 생산량이 제일 많고 보리·콩 등의 잡곡과 두류도 많이 산출된다. 채소류로 배추·무 등의 재배가 활발하며, 축산업으로 한우·돼지·닭·산양·오리를 사육하는 농가도 분포한다. 이 밖에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수산물 어획량도 적지 않다. 광공업 분야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교통편은 38번 국도가 면 중앙을 동서로 횡단하며 8·9·11번 시도가 면의 구석구석을 연결한다.

숙성(宿城)·교포(橋浦)·신(新)·안화(安化)·양교(梁橋)·죽(竹)·당거(堂巨)·길음(吉音)·창내(倉內) 등 9개 리가 있다.

  1. 진위면(振威面)

시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34.01㎢, 인구 1만 269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남리이다.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진위군의 군청이 위치했던 중심지로서 구한말까지 현내면(縣內面)이라 불리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진위군의 군내면(郡內面)·일북면(一北面)·이북면(二北面)·마산면(馬山面)의 대부분과 이서면(二西面) 야막리(野幕里), 용인군 서촌면(西村面) 일부, 양성군 승량원면(升良院面) 일부, 그리고 수원군 청호면(晴湖面) 일부를 합쳐서 12개 리로 개편하고 경기도 진위군 북면(北面)이라 하였다.

1938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됨에 따라 고대로부터 불러오던 ‘진위’라는 명칭이 일시 없어졌다가, 1948년 면의 명칭을 진위면으로 바꾸어 면의 명칭으로 다시 살아났다. 1983년 용인군 남사면(南四面) 진목(眞木)·봉명리(鳳鳴里)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1995년 갈곶리·청호리 일부와 고현리를 오산시 대원동(大元洞)으로 편입시키는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1995년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을 폐하고 도농복합형태로 신설된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산지는 동부에 무봉산(舞鳳山, 208m)이 솟아있고, 남동부에 후암봉이 있다. 이 외의 지역에 100m가 채 안 되는 구릉성 산지가 분포한다. 진위천의 물줄기가 중앙을 횡단하면서 면을 남쪽과 북쪽지역으로 구분해 놓았고, 동부에 사후천(寺後川)과 서쪽 경계지점에 오산천이 흐르면서 충적평야가 펼쳐진다.

전체면적에 대비한 경지면적은 시에서 하위에 머물고 있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약간 우세한 곳이나, 농가인구가 격감하고 있는 추세이다. 농산물로는 미곡 이외에 원예농업이 발달해 있으며, 채소류와 배·포도 등의 과일류가 생산된다. 이 밖에 젖소·닭·사슴 등의 사육도 행해지며, 양봉을 치는 농가도 있다.

오산과 용인에 인접한 수도권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제조업 분야 등 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다. 대표적인 분야로 전자·전기·제과·우유가공·화장품·자동차부품·금속·알루미늄 등 여러 업종의 업체와 각종 공장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 각종 산업시설에 종사하는 인구가 시 전체에서 제일 많을 정도로 대표적인 공업지역이다.

교통은 경부선 철도가 서부지방을 종단하고 이와 나란히 1번 국도가 달린다. 경부고속도로가 동쪽 면계를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고, 387번 지방도가 북쪽에서 대각선으로 이어져 서쪽으로 향한다. 이외에 16·17번 시도 등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동천리의 만기사 경내에 만기사철조여래좌상, 은산리에 정도전(鄭道傳)의 삼봉집목판, 봉남리에 진위향교대성전이 있다.

봉남(鳳南)·마산(馬山)·은산(銀山)·동천(東泉)·청호(淸湖)·갈곶(葛串)·야막(野幕)·가곡(佳谷)·견산(見山)·하북(下北)·신(新) 등 11개 리가 있다.

  1. 청북읍(靑北邑)

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읍. 면적 52.56㎢, 인구 2만 197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현곡리이다.

본래 수원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수원군의 청룡면(靑龍面)·율북면(栗北面)·토진면(土津面)·수북면(水北面)·서신리면(西新里面)·감미면(甘味面)·숙성면(宿城面)·목진면(木津面)의 일부를 합쳐 13개 리로 개편하고 진위군 청북면이라 하였다.

면 명칭은 청룡면의 ‘청’자와 율북면의 ‘북’자를 따서 붙여졌다고 한다. 1938년 평택군에 소속되었다. 1987년 화성군(華城郡, 현 화성시) 양감면(楊甘面) 고념리(高念里)를 편입시켰고, 1989년 안중면에 용성(龍城)·덕우리(德佑里)를 이관시켜 현 12개 리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1995년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을 폐하고 도농복합형태로 신설된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2016년 청북면은 청북읍으로 승격되었다.

기반암은 주로 선캄브리아기의 편암이다. 다른 읍면과 마찬가지로 높은 산지는 찾을 수 없으나 중앙 북부에 덕지산(德智山, 138m), 중앙 남부에 무성산(武城山, 112m), 동남쪽 오성면과의 경계에 오봉산 등이 솟아있다. 진위천이 동쪽을 흘러 고덕면과 면계를 형성하고, 남양호(南陽湖)가 서쪽 화성시와의 경계를 이루면서 해안평야지대를 만들었다. 이 외에 관리천이 면을 길게 관류한다.

전체면적 중 평야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농가와 비농가의 인구비율 중 농가의 비율이 시 전체에서 제일 높을 정도로 농업이 근간산업이 된다. 주요 농산물로 미곡을 중심으로 보리·콩 등의 잡곡, 고추·배추 등의 채소류, 그리고 특용작물로 질이 좋은 참깨가 많이 산출된다.

많은 목장이 위치한 관계로 축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가축으로는 한우·젖소·돼지·닭·산양·사슴·오리 등이다. 특히, 젖소·산양·사슴·오리의 사육두수는 시 전체에서 제1위를 점한다. 한산리에 들어선 산업단지에는 조립금속 및 기계장비 등을 주력업종으로 각종 첨단업체가 있으며, 현곡산업단지까지 조성되어 서해안 제1의 산업기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교통은 서부에 서해안고속도로가 남북으로 뻗어있고, 39번 국도가 면 중앙을 남북으로 종단한다. 340번 지방도가 중앙에서 동쪽으로 이어지고 4·5·11번 시도 등 비교적 도로망이 발달한 지역에 해당한다. 문화유적은 옥길리에 무성산성지가 있다. 현곡리에 밀양박씨(密陽朴氏), 고잔리에 고령신씨(高靈申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현곡(玄谷)·삼계(三溪)·고잔(高棧)·옥길(玉吉)·후사(後寺)·토진(土津)·백봉(栢峰)·어연(魚淵)·율북(栗北)·한산(閑山)·어소(魚沼)·고념(古念) 등 12개 리가 있다.

  1. 현덕면(玄德面)

시의 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45.90㎢, 인구 6,24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인광리이다.

본래 수원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수원군 현암면(玄巖面)·광덕면(廣德面)의 대부분, 가사면(佳士面)·안외면(安外面)·포내면(浦內面)·승양면(升良面)의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12개 리로 구성하고 진위군 현덕면이라 하였다.

면의 명칭은 현암면의 ‘현’자와 광덕면의 ‘덕’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1938년 평택군으로 이속되었다. 1989년 안중면에 화양리·인광리 일부를 이관시켰다. 1995년 송탄시·평택시·평택군을 폐하고 도농복합형태로 신설된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기반암으로 대부분의 지역에 편암이 분포한다. 산지로는 동남부에 고등산(高等山, 158m)·마안산(馬鞍山, 113m), 중앙에 옥녀봉(玉女峰, 83m), 남쪽 해안가에 옥좌봉(玉座峰, 45m) 등이 솟아 있다. 이 외 대부분의 지역은 평탄한 지형을 나타낸다. 중앙에 여러 지류가 뻗은채 서해로 흘러드는 도대천(道垈川)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경지면적이 시 전체에서 상위를 점하고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우세한 지역이다.

특히 아산만방조제가 축조된 이후 해안인근에 위치한 넓은 전답이 바다조류로부터 피해를 입지않는 안전답(安全畓)으로 바뀌어 벼농사 조건이 훨씬 좋아졌다. 주요 농산물로 고품질의 미곡뿐만 아니라 감자·마늘과 함께 특용작물로 깨의 생산량도 많다.

축산업도 비교적 성하여 한우·젖소·돼지·닭의 사육두수가 시에서 상위를 점한다. 평택호와 아산만을 끼고 있는 천혜의 항구조건을 갖춘 까닭에 어업분야가 크게 발달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는 어업에 종사하는 어가 및 인구, 어선보유 대수, 수산물 어획량 등에서 상위를 점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조업 분야의 발전은 미미한 편이다.

교통은 39번 국도가 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관통하고 2·3·5번 시도 등 기타도로가 정비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덕목리의 심복사 경내에는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인광(仁光)·도대(道垈)·운정(雲井)·화양(華陽)·황산(黃山)·덕목(德睦)·신왕(新旺)·대안(大安)·기산(岐山)·권관(權管)·장수(長水)·방축(防築) 등 12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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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역의 변천과 역사적 위상」(김덕원,『신라사학보』제34호, 2015)
평택시(www.pyeongtaek.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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