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農城)이 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 삼국시대 축성설은 도적이 심하여 양곡을 보관하기 위해 축성하였다는 설과 신선 도승(道僧)이 거주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설이 전해온다. 평택현의 고적(古跡, 古蹟)에 ‘백랑부곡(白浪部曲)’이 나오는데 이와 관계된 것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축성설은 당나라 말기 한림학사 임팔급(林八及)이 간신의 참모(參謀)를 당하여 이를 피하고자 팽성(彭城)으로 망명하였고, 이곳 농성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보는 견해이다. 고려시대 축성설은 고려시대에 토성이 많이 축조된 점, 인근에 있는 처인성과 농성의 축성법 및 입지 조건이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조선시대 축성설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다. 그렇지만 이중 어떤 의견도 합리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2003년에 이루어진 조사 결과, 동문지와 외황(外隍) 하층에서 고려시대의 토기와 기와, 분청사기 등이 출토되어 농성의 고려시대 축성설이 힘을 얻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왜구가 자주 약탈을 일삼자 이를 대비하기 위해 서해안 일대에 소규모 성들을 축조하였다. 또한 농성에서 확인된 성벽의 축조 기법과 유물들이 안성천 북방에 위치한 용성리성, 덕목리성, 비파산성 등 고려시대 토성과 비슷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농성은 고려시대 아산만 일대의 해안 방어와 관련된 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농성이 위치한 안성리 일대는 진위천(振威川)과 안성천 합류 지점의 남쪽에 있어 아산만 지역이 갖고 있는 수운의 편리함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곳이다. 평택 지역에는 14개소의 성곽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 가운데 12개소가 토성이다. 그 가운데 농성을 비롯해 비파산성, 덕목리성, 용성리성, 무성산성 등 5개소의 토성에 대해 약간의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져 당시 토성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농성은 해발 24m의 낮은 구릉(丘陵) 정상부를 중심으로 그 외곽을 감싸고 있는 평지의 토성으로 평면의 형태가 긴 사각형 모양이며 성벽의 중간 지점이 약간 돌출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337m로 소형 성에 속하며, 성벽은 대체로 해발 20m 등고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성벽 중심부 남북의 길이는 116m, 동서의 길이는 81m이며, 내부 면적은 5,964㎡이다. 성의 동벽과 서벽의 중앙에서 각각 1개소의 문지가 확인되었으며, 고고학적 조사는 서벽의 내벽과 동벽의 외벽 그리고 동문지에서 이루어졌다.
농성의 체성(体城)은 기반층 위에 점토를 깔아 기저부를 조성하고, 그 위에 점토와 마사토를 교대로 쌓아올렸다. 외벽의 높이는 58m, 내벽의 높이는 2.23.5m이고, 성벽 기저부의 너비는 1017m이며, 토루(土壘)의 너비는 2m 정도이다. 외벽의 하단에 너비 35m의 외황이 설치되어 있다. 외황을 팔 때 나온 토사는 성벽을 쌓는 데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외황의 바닥층에서 고려시대의 토기와 기와편이 출토되어 성의 축성 시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동문지는 훼손이 심해 문지의 정확한 형태나 규모를 밝힐 수 없지만 문지의 최대 너비는 6.4m, 동서의 길이는 17m 정도로 추정된다. 통로부 바닥 암반층 위에서 길이 약 8m의 배수로가 확인되었고, 그 내부에서 분청사기편, 고려 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