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목조건물의 지붕에는 이엉이나 볏짚, 그리고 나무껍질 같은 식물성부재를 사용하였는데 내구력이 약하여 자주 교체해야 되기 때문에 방수효과가 좋고 강도가 높은 반영구적인 점토소성품(粘土燒成品)인 기와가 출현하게 되었다.
목조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여 지붕을 이는 풍습은 고대 동양건축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이지만, 그 기원은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문헌인 ≪고사고 古史考≫에 “하나라 때 곤오 씨가 기와를 만들었다(夏時昆吾氏作瓦).”라는 옛기록이 있고, 약 3천년 전 주나라 때 사용된 기와가 현재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르러 기와가 매우 성행했던 점을 통하여 이의 기원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나라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서기전 2, 1세기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를 전후하여 한반도의 북반부에 목조기와집의 새로운 건축기술이 등장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 기와집의 유래와 변천도 중국에서의 기원과 발달과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한사군의 설치에 따른 새로운 문화의 자극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그런데 목조건물의 지붕에 사용되는 위치에 따라 그 모양이나 명칭이 각각 다르고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가장 기본적이고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지붕에 씌워 기왓등과 기왓골을 형성하여 눈과 빗물에 대한 누수를 방지하기 위한 수키와[圓瓦, 夫瓦]와 암키와[平瓦, 女瓦]이다. 대부분의 수키와와 암키와는 원통형의 목제 모골의 외측에 삼베나 무명 등의 포목을 감고 양질의 진흙을 다진 점토판(粘土板)을 씌워 방망이 같은 고판(叩板)으로 두들겨 얼마 동안의 건조 기간을 거친 다음에 와도(瓦刀)로 2분하거나 3분 또는 4분하여 제작한다.
형태에 따라 기와의 끝에 언강이라고 부르는 낮은 단(段)이 있어서 미구(수키와의 층이 져 나온 끝부분)가 내밀고 있는 유단식(有段式)과, 언강과 미구가 없는 토시형의 무단식(無段式)으로 구분되는데, 대부분 그 표면에 선(線)·승석(繩蓆)·격자(格子)·화엽(花葉) 등의 고판무늬가 장식되고 있다. 그러나 간혹 절이름·제작기호·제작연대·사용처 등이 압인(押印)되거나 새겨져 있어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막새[瓦當]는 지붕의 추녀 끝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기와로 수키와 끝에 원형의 드림새 [垂板]가 부착된 수막새[圓瓦當]와 암키와 끝에 장방형의 드림새를 부착한 암막새[平瓦當]로 구분되고 있다.
암·수막새는 여러 가지 무늬가 오목새김된 목제 또는 도제(陶製)의 와범에서 찍어낸 것으로 연꽃·당초(唐草)·보상화(寶相華)·귀면(鬼面)·금수(禽獸) 등의 다양한 무늬가 드림새에 새겨져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채로운 변화를 보이고 제작기법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고고학이나 미술사의 연구에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이러한 일반형의 기와 이외에 용마루의 양쪽 끝에 높게 장식된 치미(鴟尾), 각 마루 끝에 벽사(辟邪)의 의미로 사용되는 귀면기와, 그리고 각 마루를 쌓아 올리는 적재[堤瓦], 마루 밑의 기왓골을 막는 착고기와[着固瓦], 서까래의 부식을 방지하고 이의 치장을 위한 서까래기와[椽木瓦], 각 마루의 추녀 밑의 네모난 서까래에 사용되는 사래기와 등이 있다.
또한, 암막새 2매를 접합하여 제작한 모서리기와[隅瓦], 지붕의 처마가 ㄱ자모양으로 꺾인 회첨(會擔)에 사용되는 타원수막새[楕圓瓦當]와 이와 조합되는 특수한 암막새, 귀면기와의 상단에 얹혀져 건물의 곡선미를 강조하여 주는 굽은 형태의 특수기와, 건물 내부의 닫집이나 조그만 건물에 사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소형 막새도 있다.
그리고 1매의 암키와를 대각선 방향으로 2분하거나 종횡으로 여러 번 분할하여 제작한 왕지기와[三角平瓦]와 사변형의 방형기와[方形瓦]가 있고, 지붕 이외의 장소에 장식용으로 사용되는 특이한 형태의 녹유기와[綠釉瓦] 등도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기와의 종류 가운데 일반화된 암·수키와와 막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식기와·특수기와들은 방수성이나 내구성을 지닌 본래의 기능 외에 기와집의 경관과 치장을 돋보이게 하려는 새로운 건축의장의 발달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많은 종류의 기와의 개발과 막새에 새겨진 다채로운 무늬의 채용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룩되었다.
⑴ 삼국시대
① 고구려 :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일찍부터 한민족과 접촉이 빈번하였으므로 국내성도읍기에 이미 기와의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백제나 신라보다 먼저 기와를 덮은 목조건물을 지었다. 고구려의 기와는 수키와와 암키와, 그리고 수막새, 반쪽수막새[半瓦當]·끝암키와[端平瓦]·치미·착고기와 등으로 구분된다.
수키와와 암키와, 그리고 문자가 기입된 명문수막새는 집안(集安)지방에서 초기의 것이 발견되고 있고,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는 연꽃무늬가 장식된 수막새가 427년(장수왕 15)의 평양천도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제작되게 된다. 수막새에는 연꽃·보상화·인동(忍冬)·초화(草花) 등 여러 가지 무늬가 장식되었는데, 연꽃무늬가 중심이 되며 양식적인 변화도 풍부하다.
연꽃무늬는 단판(單瓣)·중판(中瓣)·세판(細瓣)·혼판(混瓣) 등 여러 양식으로 변천되고 있어서 그 의장의 다양함을 살필 수가 있다. 그 가운데 중국 한나라의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막새의 면을 두 줄 또는 세 줄의 선각으로 등분하여 연꽃잎을 각각 시문하고 있는 단판양식이 비교적 오래된 양식에 속한다.
그런데 평양으로 천도한 다음부터는 막새의 면을 구획한 선각이 점차 사라진다. 또한, 꽃잎모양의 사이 잎인 간판(間瓣)이 생겨나고 보상화·인동·초화 등의 새로운 무늬가 채용되면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양식이 성립되게 된다. 고구려의 기와는 대부분 적갈색을 띠고 있는데, 연꽃무늬가 새겨진 수막새의 경우 꽃잎의 수가 4잎에서 10잎까지 매우 다양하고, 꽃잎의 너비도 좁고 그 끝이 날카로우며 볼륨이 매우 강하여, 전체적으로 강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점이 주요한 특색이다.
② 백제 : 백제의 기와는 한성(漢城)에 도읍했던 당시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수막새와 암·수키와를 통하여 초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살펴볼 수가 있으나 단편적인 자료에 불과하고, 웅진으로 천도한 5세기 후반 475년(문주왕 1)부터 중국 남조의 양나라의 자극을 받아 백제적인 기와의 특색이 점차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538년(성왕 16) 사비에 천도한 뒤 궁성이나 사찰 건축이 활발하게 조영됨에 따라 본격적인 제작활동을 전개하여 다양한 양식변화를 나타냄과 동시에, 신라를 비롯하여 일본의 아스카문화(飛鳥文化)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백제의 기와는 수키와와 암키와, 수막새와 서까래기와, 그리고 치미 등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백제기와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수막새이다. 수막새에는 연꽃무늬가 중심적으로 장식되고 있는데, 간혹 파문(巴文)이나 무늬가 없는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
수막새의 연꽃무늬는 연판(蓮瓣)의 내부에 자엽(子葉)이 장식되지 않는 소판(素瓣) 위주의 단판양식이 대부분으로, 각 연판의 형식은 그 끝이 치켜올라간 반전(反轉)상태인 것, 뾰족한 것, 그리고 그 끝이 갈라지거나 구슬무늬[珠文]가 별도로 첨가되고 있는 것 등 여러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백제 후기인 7세기 전후부터는 연판의 내부에 인동무늬 자엽이 배치되는 새로운 양식과, 단일연판에 능선이 생기고 그 좌우에 꽃모양의 자엽 2개가 장식되는 복판양식(複瓣樣式)이 출현하게 되지만 실례는 적다. 백제의 기와는 대부분 연회색을 띠고 있고 연꽃무늬가 양감이 적은 소판을 위주로 그 끝이 부드럽게 융기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점이 주요한 특색이다.
③ 신라 : 신라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비와(飛瓦)나 옥와(屋瓦) 등의 기록을 통하여 3, 4세기경부터는 당시의 궁궐 건축에 수키와와 암키와가 제작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연꽃무늬가 장식된 수막새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궁궐이나 사찰 건축에 사용된 시기는 528년(법흥왕 15)에 불교가 공인되고 흥륜사·황룡사 등의 사찰이 조영되기 시작한 6세기 중반부터이다.
신라는 이 무렵에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아 양식적으로 서로 다른 두 계통의 복합과정을 거치면서 6세기 후반부터는 연판의 내부에 능선이 새겨지고 연꽃잎의 끝이 둥글게 되거나 치켜올라가는 독자적인 양식을 전개시키게 된다.
고신라시대에는 얼굴무늬[人面文]와 귀면무늬가 새겨진 수막새가 약간씩 제작되고 있으나 연꽃무늬가 장식된 것이 대부분이며 전체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투박함을 보여 주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대형의 치미는 그 옆면과 뒷면에 얼굴무늬와 연꽃무늬를 번갈아 장식하고 있어, 특수한 의장을 보여 주는 고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기와이다.
⑵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는 7세기 후반기에 고신라의 전통을 바탕으로, 고구려 및 백제의 영향과 당나라의 자극에 힘입어 폭넓은 복합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양식변화를 낳고 있다.
수막새는 연꽃무늬가 중심적이고 양식변화도 가장 풍부한데, 종래의 단순소박한 단판양식에서 연판의 내부에 자엽이 새겨지고 주연부(周緣部)에 구슬무늬나 꽃무늬 등이 장식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전환되면서 복판·중판·세판·혼판 등의 양식적 발전을 보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유행한 것은 막새면을 안팎으로 구획하여 꽃잎을 이중으로 배치하고 있는 중판양식이다.
연꽃 이외의 주요 무늬로는 보상화·인동·초화 등 식물을 소재로 한 서화(瑞花)무늬와 봉황·기린·사자·가릉빈가(迦陵頻伽 : 불경에 나와 있는 상상의 새) 등 벽사(辟邪)와 길상(吉祥)을 의미하는 새나 짐승의 무늬를 들 수 있다.
암막새는 통일신라시대 직후부터 당초무늬가 새겨져 제작되게 된다. 초기의 양식은 고식의 당초무늬가 대칭형으로 유려하게 새겨진 턱이 없는 무악식(無顎式)이지만, 점차 드림새의 너비가 넓어지면서 막새의 턱과 암키와의 접합부가 직각을 이루게 되는 유악식(有顎式)으로 발전한다. 이에 따라 초기의 당초무늬도 여러 문양들과 조합되어 보상화당초·인동당초·포도당초·화엽당초 등의 여러 무늬로 변화되어 장식적인 특색을 발휘하게 된다.
한편, 수막새에 새겨진 새나 동물무늬·용·비천(飛天)·구름 등이 암막새의 무늬로 채용되어 화려한 의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녹유기와를 비롯하여 특수기와와 장식기와들이 다양하게 제작되어 동양의 기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가 최고봉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⑶ 고려 이후
초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연꽃무늬나 당초무늬가 새겨진 막새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퇴화되고, 새로운 무늬로 귀목무늬[鬼目文]가 돌발적으로 채용되고 청자기와가 출현하여 이채를 띤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원나라의 자극을 받아 범자(梵字)가 새겨진 막새가 나타나는 동시에 암막새의 드림새가 역삼각형으로 변형되면서 조선시대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둔각을 이루는 접합수법이 보이고, 막새의 뒷면에 포목(布木) 흔적이 남아 있어서 전통적인 기와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난 퇴락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 나라의 기와는 지붕에 사용되는 위치에 따라 그 모양이나 명칭이 다르고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천되어 각기 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기와는 모두 건물을 짓기 이전에 그 사용처를 미리 고려하여 제작된 것으로, 국가적인 조영사업의 하나로 많은 수량이 만들어졌다.
한편, 막새에 보이는 여러 가지 무늬들은 단순한 미적 대상으로 장식된 것이 아니라 평안과 번영을 소망하는 당시 사람들의 정신적 이상을 반영한 것으로, 와공(瓦工)들이 고심하여 창안한 독자적인 의장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