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점토로 제작되고 있는데 용마루에 얹힐 수 있도록 하단부의 중앙에 적새[積瓦]와 연결하는 반원형 또는 방형의 홈이 가로로 패어 있어 고정시킬 수 있게 되어 있다.
측면은 몸통과 깃 부분을 구획하는 굵은 돌대가 설정되어, 그 안쪽에는 침선(沈線)이나 꽃무늬를 배치하고 바깥쪽에는 봉황의 날개깃과 같은 단열(段列)이 층을 이루면서 호형(弧形)으로 길게 뻗어 있다. 앞면은 굴곡된 능골이 반전되고 있으며 뒷면은 무늬가 전혀 없는 공백 상태이거나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인 형태이다.
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상징으로서 의장(意匠)된 상상의 새인 봉황에서 비롯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 한나라 때는 반우(反羽), 진나라 때는 치미, 당나라 때는 치문(鴟吻), 통일신라 때는 누미(樓尾)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어 왔다.
고구려의 치미는 4∼5세기경의 고분벽화에 나타난 궁궐의 건물에서 그 흔적이 이미 나타나고 있고, 평양 부근의 여러 절터나 궁궐터에서 약간씩 출토되고 있으나 소수에 불과하다.
백제의 치미는 부여에 천도한 이후부터 많은 수량이 제작되고 유행하게 되어 일본의 아스카문화[飛鳥文化]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부소산의 서복사지(西復寺址)에서 출토된 치미가 유일하게 복원되어 그 모습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뒷면에는 연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고 층단을 이룬 날개깃은 측면에서 보면 그 독특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고신라의 치미는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이다. 높이 182㎝, 너비가 105㎝인 동양 최대의 대형 치미로 양 측면과 뒷면에 손으로 빚어 만든 연꽃과 사람얼굴의 무늬를 서로 엇갈리게 번갈아 부착하고 있어서 주목되는데 그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조립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치미는 양 측면에 변형된 4엽의 꽃무늬가 배치되고 층단을 이룬 날개깃만이 단순하게 조각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는데, 건물 내부의 닫집에 사용된 소형 치미와 돌로 된 치미도 제작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는 중국 당나라 후엽부터 유행된 치문의 영향을 받아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물을 뿜어내는 어룡형(魚龍形)으로 그 의장이 변형되고, 점차 용두(龍頭)·취두(鷲頭) 등의 새로운 장식기와로 바뀌면서 전통적인 치미의 형태에서 벗어나 퇴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