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석보 ()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 초기,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전라남도 여수에 축성한 관방 시설.
이칭
이칭
여수보(麗水堡), 석보창(石堡倉), 석창성(石倉城)
유적
건립 시기
1452∼1457년
관련 국가
조선
둘레
703.4m
면적
77,393㎡
소재지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868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2012년 06월 22일 지정)
소재지
전남 여수시 여천동 868-0
내용 요약

여수석보(麗水石堡)는 조선 초기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전라남도 여수에 만든 관방시설이다. 조선 초기 읍성을 만든 후 치소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요해처에 석보를 쌓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설치된 곳이다. 문종 2년(1452)에서 세조 3년(1457) 무렵 이 석보를 쌓았으며, 연해안 방어 체제가 변하면서 중종 17년(1522)에 혁파되었다. 석보를 지키던 군병은 이웃 돌산진으로 옮겨갔고, 군사 시설이던 석보는 환곡을 보관하는 창고로 전용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환곡 제도가 폐지되면서 이 석보창도 폐지되었다.

정의
조선 초기,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전라남도 여수에 축성한 관방 시설.
건립경위

여수석보(麗水石堡)는 소위 석창사거리로 불리는 지역의 남쪽 평지에 있다. 이 주1는 전라도에서는 최초로 연해안에 설치된 석보로 문헌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57년(세조 3)이다. 세종 26년(1444) 경 왜구를 방어하는 데 유리한 고을들을 중심으로 연해안에 읍성들을 쌓기 시작하였다. 연해안 지역의 읍성들이 대략적으로 완공된 후 주2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주9에도 방수군(防戍軍)을 배치하기 위해 석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여수석보의 경우 세종 27년(1445)에 석보를 축조하기로 결정되었으며, 문종 2년(단종 즉위, 1452)부터 쌓기 시작하여 세조 3년(1457)이 되기 전에 석보가 완성되었다. 석보를 설치한 후 방어할 수 있는 군인의 수가 적어 성종 10년(1479)에는 순천의 유방정병(留防正兵) 주3를 석보로 이속시켰다. 그리고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방호를 하도록 조치하였다. 여수석보는 육수군 소속으로 순천진의 보조적인 방어시설이었으며, 순천부사가 겸하는 순천진 첨절제사가 운용의 책임을 맡았다.

연혁

여수석보는 중종 17년(1522) 연해안 방어 체제가 변화하면서 더이상 본래의 기능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수석보에 배치되었던 군병은 이웃의 돌산진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변화는 전라 좌수영과 방답진(防踏鎭)을 축으로 지역 방어의 중심을 재편한 데 따른 조치였다.

여수석보가 없어지고 난 후 군사 시설이었던 석보는 여수, 삼일포, 소라포 등 세 고을의 환곡을 쌓아두는 창고로 쓰임을 바꾸어 석보창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환곡 제도가 폐지되면서 석보창도 함께 폐지되었다. 석보창 일대는 17세기 초반에 장시(場市)가 개설될 정도로 거주 인구와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발굴경위 및 결과

3차례의 발굴 주10 결과 여수석보의 규모와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여수석보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지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성의 외벽은 주4을 이용하고, 내벽은 흙을 이용하여 쌓은 편축식 성곽이다. 성의 네 모서리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성곽 형태인 각진 모양이 아니라 주5으로 만들었다.

성벽의 기초부는 너비 5.7~9m 정도의 소형 할석을 먼저 깔고, 그 위에 15~30cm 크기의 판석재 할석을 전체적으로 깐 후 주6을 놓았다. 지대석으로 50∼170cm 정도 길이의 판석재를 주로 사용하였다. 성벽의 기초부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축조 방식은 여수석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수석보의 성벽은 조선시대의 다른 석축성들과 같이 지대석의 끝에서 안쪽으로 20~30cm 정도 들여서 1단을 올리는 기법을 적용하였다. 체성의 1단석은 1.5∼2m 정도의 대형 석재를 이용하였다. 내벽의 석재는 기반층 위에 1열∼2열의 판석재를 지대석 쪽 면에 맞추어 2단 정도 높이로 쌓아 올렸는데, 이러한 방법을 통해 지대석과 면석을 고정시켰다. 그 위에 20∼30cm 정도의 할석을 일정 높이까지 쌓아 올리고 백제∼고려시대 문화층을 기반으로 흙을 쌓아 다졌다. 그렇기 때문에 여수석보의 내탁다짐층에서는 토기, 자기, 기와 등이 출토되고 있다.

여수석보의 전 구간에서 너비 5m 규모의 해자가 조사되었다. 해자는 체성에서 약 6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문지가 있는 경우에는 10m 정도 떨어져 있다. 해자의 양쪽은 호안석축(護岸石築)을 하여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동쪽 해자는 깊이 140cm, 6∼7단의 석축이 남아 있고, 북쪽 해자는 파괴되어 1∼2단의 석축만 남아 있다. 체성의 서벽에서 ‘구례시면(求禮始面)’, 남벽에서 ‘화순(和順)’, ‘ 옥과(玉果)’ 등의 주7이 발견되어 해당 고을들이 여수석보를 축성하는 데 참여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여수석보에는 동문, 서문, 남문 3곳의 문지가 있으며, 성내에서 조사된 부속 시설로 주8 21동, 불을 사용한 흔적인 소성유구 30기, 수혈 100기, 연못지 1곳 등이 있다. 여수석보의 규모는 동벽 167.8m, 서벽 170.6m, 남벽 186.5m, 북벽 186.5m로 석보의 전체 둘레는 703.4m이다. 동서벽의 길이가 남북벽의 길이보다 짧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순천부읍지』
『여수읍지』

단행본

대한문화재연구원, 『麗水 石堡 3차 발굴조사(2지구)』(2017)
마한문화연구원, 『麗水 石堡 3차 발굴조사(1지구)』(2017)
명지대학교·순천대학교·전남대학교, 『石倉城址 發掘調査 報告書』(2003)
마한문화연구원, 『麗水 石倉城址 2차 발굴조사』(2008)

논문

변동명, 「조선시기 여수의 석보와 石(堡)倉」(『역사학연구』 33, 2008)
차용걸, 「고려말‧조선전기 대왜 관방사 연구」(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최인선, 「여수 석보(석창성) 발굴의 성과와 특징」(『한국성곽학보』 22, 2012)
주석
주1

돌을 쌓아 만든 보루. 우리말샘

주2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주3

125명

주4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주5

활의 모양. 우리말샘

주6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주7

글로 명백히 기록된 문구. 또는 그런 조문(條文). 우리말샘

주8

어떤 건물이 있던 터. 우리말샘

주9

전쟁에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 우리말샘

주10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파내서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조사. 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찾아 밝혀내기 위해 하는 조사. 우리말샘

주11

가마에서 벽돌 따위를 구워 만듦.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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