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자는 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이다. 주황(周隍), 구지(溝池), 외호(外壕), 호성하(護城河)로 불리기도 한다. 선사시대 취락을 감싼 환호에서 유래하였는데, 주로 성곽이나 고분에 조성되었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성곽을 방어하거나 식수를 확보하거나, 성 안의 물과 오물을 바깥으로 배출하거나, 선박을 이용하여 물자를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한 대형 고분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묘역을 확정하기 위해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을 축조하거나 고분을 조성할 때 주변에서 흙을 채취하면서 만들어진 웅덩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해자(垓子)는 주황(周隍), 구지(溝池), 외호(外壕), 호성하(護城河)로 불리기도 한다. 내부에는 물을 채우는 경우도 있고 채우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해자가 주로 발견되는 시설물은 성곽과 고분이다. 선사시대 취락의 주위에 돌린 환호(環濠)도 해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무덤의 주위에 돌린 도랑은 일반적으로 주구(周溝)라고 부르는데 삼국시대 대형 고분을 감싼 도랑을 해자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특히 영산강 유역과 일본열도 각지에 분포하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경우 분구(墳丘)를 감싼 도랑을 해자 혹은 주황, 주호(周壕)라고 부른다.
중국과 한국, 일본 모두 고대-중세 성곽의 외곽에는 해자를 돌려 성곽을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해자를 돌리는 것은 세계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다. 보통 산성은 도랑을 파더라도 물이 흐르지 않는 경우가 많은 반면, 평지에 만들어진 도성, 읍성 등은 자연 하천 그 자체를 해자로 삼거나 하천의 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여 해자를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성곽 주위에 두른 해자의 연원은 선사시대 취락을 감싼 환호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이후 취락 주변에 환호를 돌려 방어적인 성격을 분명히 하는 방어취락이 등장한다. 유럽이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로 선사시대부터 취락을 보호하는 환호가 나타나고 성곽의 등장 이후에는 본격적인 해자를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청동기시대 이후 그 수와 규모는 크게 늘고 마침내 본격적인 성곽과 해자로 발전하게 된다. 평지에 만들어지는 성곽은 대개 큰 강의 본류나 지류에 접해서 만들어지는데 그 이유는 강이 자연적인 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평지성은 강물을 인공적으로 돌려 성의 사방을 감싸서 해자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성을 보호하는 강이란 의미로 호성하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환호가 등장한 시점은 청동기시대이고 이후 초기철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까지 이어진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왕성인 왕검성(王儉城) 역시 해자를 갖추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실상은 알 수 없다. 따라서 한국사에서 확실한 해자는 삼국시대 유적에서 찾아야 한다.
고구려 최초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중국 요령성 환인(桓仁)시 하고성자(下古城子)는 혼강을 자연적인 해자로 삼고 있으며 두 번째 왕성인 길림성 집안(集安)시 국내성(國內城)은 압록강과 그 지류인 통구하(通溝河)를 해자로 삼고 있다.
한성기 백제 왕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풍납토성(風納土城)은 한강 본류와 지류를 이용하여 해자로 삼았으며, 인근의 몽촌토성(夢村土城) 역시 한강의 지류를 이용하여 해자를 돌렸다. 웅진기의 왕성인 공산성(公山城)은 산성에 해당되지만 금강을 자연적인 해자로 삼고 있다. 사비기의 부여 나성(羅城)은 백마강이 크게 굽이치는 지점에 위치하여 북편과 서편으로 강을 자연적인 해자로 삼고 있다.
신라의 왕성인 경주 월성(月城)의 경우, 월성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이 남쪽의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북편과 동편, 서편은 불규칙한 웅덩이를 파서 해자를 만들었다. 통일 이후에는 사면에 돌을 깔아서 호안석축을 마련하고 연못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때부터는 해자의 고유한 기능인 방어 이외에 관상의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평지에 만들어지는 읍성은 대부분 해자를 갖추게 된다.
이웃 일본의 경우,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취락을 보호하던 환호는 고훈시대〔古墳時代〕에 접어들어 수장의 거관을 보호하는 해자로 변화하며 중세 시대의 성곽은 대부분 해자를 갖추게 된다. 한편, 무덤의 주위에 해자를 둘러 안과 밖을 구분하는 관념은 청동기시대부터 있어 왔다. 원삼국시대에 유행한 주구움무덤〔周溝土壙墓〕과 분구묘(墳丘墓) 역시 묘역을 도랑으로 표현한 점에서 동일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성곽 주위에 해자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성곽을 방어하기 위한 용도가 주목적이다. 해자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산의 동래읍성 해자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칼에 머리를 맞아 살해당한 인간 등 많은 사람의 인골이 갑옷, 창, 활 등의 무기와 함께 발굴되어 당시 전쟁의 양상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해자의 또 다른 기능은 식수의 확보, 성 안의 물과 오물을 바깥으로 배출하거나, 선박을 이용하여 물자를 효과적으로 운반하고 접안하는 기능 등 다양하였다. 특히 자연 하천을 해자로 삼은 경우, 해자는 물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 육조시대의 도성인 건강성(현 중국 江蘇省 南京市)은 양자강의 지류인 진회하(秦淮河)를 서편의 해자로 삼았는데 이곳에 교통과 물류를 담당한 접안시설, 교량, 창고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풍납토성의 경우도 자연, 혹은 인공해자를 이용한 접안시설과 성 안팎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자는 연못, 원지와 같은 관상 기능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애초 방어용 목적으로 만들어진 해자에 석축을 하여 연못으로 개조한 경주 월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상의 목적을 지니고 해자가 만들어지지만 성곽을 만드는 과정을 고려하면 해자의 출현은 자연발생적인 측면도 있다. 거대한 토성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다량의 흙을 채취하여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성 내외에 거대한 웅덩이가 만들어진다. 이 웅덩이를 의도적으로 활용하면서 방어력을 강화시킨 것이 해자의 또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고분을 감싼 해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형 무덤 주변의 해자는 무덤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묘역을 확정하기 위한 본연의 기능 이외에 거대한 분구를 성토하기 위한 토량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 지면을 굴착한 결과이기도 하다. 일본 오사카의 전인덕천황릉(傳仁德天皇陵)은 5세기대 전방후원분으로서 전체 길이가 486m인데 삼중의 해자로 이루어진 묘역은 길이 800m를 넘는다. 해자의 굴착에서 나온 흙은 대부분 분구의 성토에 이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성곽, 특히 도성은 대부분 해자를 갖추고 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인 길림성 집안시의 국내성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 본류에 합류하는 통구하와 압록강을 이용하여 해자로 삼고 있다. 한성기 백제 왕성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모두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를 이용하여 해자를 만들었다. 부여의 사비 도성(泗沘 都城)은 백마강이 크게 만곡하는 지점에 만들어짐으로써 백마강을 도성 서편과 남편을 방어하는 자연적인 해자로 삼았다. 신라 왕성인 월성 역시 남천(南川)이란 자연 하천을 이용하여 해자를 만들었는데 초기에는 방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삼국통일 이후에는 석축 호안을 만들어서 관상적인 기능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청주읍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고창읍성, 동래읍성, 김해읍성, 웅천읍성, 광양읍성 등 조선시대의 읍성에는 대부분 해자가 남아 있다.
삼국시대 성곽의 해자는 청동기시대에 등장한 환호가 계승, 발전된 것으로 평가되며 주된 기능은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어력 증강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이밖에도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해자가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전투의 장으로 이용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전투의 참상을 생생히 보여준 동래읍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