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나성은 사비 도성의 외곽을 두른 성벽으로 평면은 부정형에 가깝지만, 도성의 4면을 따라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고 방위에 따라 북나성, 동나성, 서나성, 남나성으로 명명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까지 지표 및 발굴 조사를 통하여 북쪽과 동쪽 성벽의 존재만이 확인되고 서쪽과 남쪽의 성벽은 존재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명확하게 실체가 확인되는 나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6.6km로 성벽 선은 부소산성 북문지 동쪽에서 가증천 제방과 청산을 지나다가 남동쪽으로 우회하여 월함지에서 석목리-능산리 산(해발 116m) 정상부까지 이어지고 다시 남쪽 방향으로 산사면을 따라 내려와 왕포천을 건너 필서봉(해발 118m)-염창리 산(해발 134m) 봉우리를 따라 백마강으로 남향하면서 산 끝자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백제 사비 도성은 이전의 한성과 웅진처럼 왕성(王城) 중심의 도성 구조와는 다르게 왕궁을 비롯한 정치 중심지가 위치한 도심의 외곽을 성벽으로 둘러싸는 독특한 성곽 구조 체제를 가진다. 이러한 부여나성은 축조와 관련한 문헌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를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건립을 고려하였던 도성 내 시설물이라는 관점에서 천도 전후인 538년 즈음에 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부여나성은 사비 도성을 보호하고 그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쌓은 성벽이다. 도성의 동북쪽 외곽을 감싸는 형상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그 형태가 반달과 같다고 하여 ‘반월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여나성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91년 능산리 일대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30여 차례 이상 진행되어 성벽 진행 방향, 축성 기법, 성 내외 시설물 등이 확인되었다.
부여나성의 성벽 중 북나성은 부소산성 북문지 동편부터 청산 동사면 끝자락까지의 구간으로 그 길이는 약 1km 정도이고, 성벽의 잔존 최대 높이는 6.23m, 석축부 면석의 최대 잔존 높이는 2.1m 정도 남아 있다. 북나성 구간 중 청산 구간은 ‘청산성’으로 지정되었던 곳으로 정상부 일대에서 평탄한 대지를 조성한 후 굴립주, 벽주, 초석 건물 등을 조성한 유적이 위치한다.
동나성은 청산의 동쪽 모서리에서 능산리 산을 경유하여 왕포천-필서봉-염창리 산으로 이어지는 약 5.5km에 해당되는 구간이다. 동나성 구간은 주로 왕포천 일대의 저습 지대의 평지 구간과 능사의 서쪽과 필서봉 일대의 산지 구간에 대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7m, 석축부 최대 잔존 높이는 3m이다. 왕포천 일대의 저습지 구간에서 부엽 공법이나 말뚝 공법 등의 다양한 연약 지반 처리 공법 등이 확인되었고, 능사의 서쪽 성벽 성돌에서 ‘부토(扶土)’, ‘궁토(弓土)’, ‘백호□호(白虎□虎)’명의 각자성석(刻字城石)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서나성은 부소산성 서문지에서 시작하여 구교리와 군수리 일대에 성벽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지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조사한 결과, 성벽과 관련한 성벽 몸체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고, 추정 지점 일대에서 사비의 기와 건물의 흔적 및 경작 시설, 대지 조성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남나성 또한 추정 지점에서 성벽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 실정으로 서나성과 남나성은 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를 종합해 보면, 사비 도성은 서에서 남에 걸쳐 흐르는 금강을 자연 참호로 삼고, 북에서 동으로는 해발 100m 내외의 기복이 있는 산(부소산, 금성산, 필서봉)을 천혜의 장벽으로 삼았으며, 특히 북동쪽은 산봉우리와 그 사이 평야를 잇는 성벽을 쌓아 도성 반대쪽의 금강과 서로 대응되게 하여 도성의 경계를 마련한 것으로 이해된다.
나성의 성벽은 현재 석축 성벽인 상태로 남아 있지만, 토(土) 성벽을 석축 성벽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처음부터 성벽의 내부는 토축으로 외부는 석축으로 축성된 견해로 나뉜다. 성벽의 축성 방식은 성벽이 지나는 곳의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는데 산사면의 경우 경사면에 내탁하여 축조하였고 평지의 경우 석축이 의지할 수 있는 성벽 몸체를 먼저 흙으로 만든 후 그 외부를 할석이나 다듬은 석재로 마감하는 방식으로 구축하였다.
지형별로 살펴보면, 먼저 산 구릉의 정상부나 경사면을 경유하는 산지 구간은 기본적으로 원지형을 경사지거나 계단식으로 깎아서(삭토법) 마련한 기저면 위로 외측은 석축하면서 동시에 내면은 흙다짐하여 토축한다. 외측의 석축을 조성할 때는 하부를 도랑처럼 파거나 평평하게 정지하여 기초석을 쌓은 뒤 그 상부는 장방형의 면석을 '品'자 모양으로 바른 층 쌓기 하고 뒤쪽은 일정 폭으로 할석을 채워서 뒤채움 석을 쌓았다. 석축부의 내측은 흙으로 조성되는데 성벽 높이에 따라 경사-수평-역경사 방향으로 쌓고 있다. 산지 구간의 성벽은 돌로 조성되는 석축부와 흙으로 조성되는 토축부가 동시에 조성되는 구간(토 · 석축 동시 공정)도 있지만, 먼저 토축부를 조성한 후 앞쪽을 정리하여 석축을 조성하는 구간(선토축 후석축 공정)도 있다.
다음으로 왕포천이나 가증천 등의 충적지나 하천을 경유하는 평지 구간은 습지 토양인 모래나 펄 등의 연약한 지반에 성벽이 구축된다. 이때 지반의 침하를 방지하거나 상부의 성벽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낙엽이나 나뭇가지를 까는 부엽 공법, 무른 흙을 파내고 다른 성질의 흙을 채우는 치환 공법, 나무 말뚝 공법 등의 다양한 연약 지반 처리 공법이 확인된다. 평지 구간의 성벽은 낮은 산처럼 흙을 다져 쌓아 성벽의 몸체를 만들고 외면은 석축으로 마감하는데, 가증천을 지나는 북나성 성벽의 경우 단면 사다리꼴 형태로 석축부를 먼저 만든 다음 토축부를 석축에 기대어 경사지게 쌓는 방식(선석축 후토축 공법)도 확인된다. 이처럼, 부여나성은 성벽이 조성되는 지점의 입지에 따라 다양한 축성 방식이 적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부여나성에서 확인되는 문지는 모두 7곳으로 추정되며, 이중 동문지 2곳, 북문지 1곳이 발굴 조사 되었다. 평지 구간에서 확인된 동 3문지와 북 2문지는 개거식의 형태이며, 산지 구간에서 확인된 동 2문지는 성벽을 어긋나게 배치시켜 성 외측에서 보면 문이 보이지 않는 구조이다. 치성 벽은 동나성과 북나성에서 각각 1기씩 조사되었는데, 동나성 치성 벽의 경우 길이 5.1m, 너비 22.4m, 높이 7m 가량의 대형으로 현존하는 삼국시대 치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현재 부여나성은 전체 성벽 선을 따라 탐방할 수 있는 둘레길이 조성되었으며, 성벽은 북성벽 약 400m, 동성벽 약 1.2km 구간이 복원된 상태이다.
부여나성은 기본적으로 도성민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시설임과 동시에 수도의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벽이 축조되는 시기는 연구자들에 따라 천도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지만, 발굴 조사된 자료와 출토 유물을 통해서 보면 천도 이전부터 이미 성벽의 축조는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구간에 따라서는 천도된 이후에도 성벽 공사가 계속 진행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부여나성은 사비 도성의 외곽 성으로 도성 안에는 왕궁과 방어성, 사원, 일반민의 거주 구역 등과 같은 ‘삶의 영역’으로, 그 바깥은 왕릉 등의 ‘사후 영역’으로 배치하여 도성의 범위 및 위엄을 보여 주는 핵심적인 장치로 부여 부소산성과 함께 사비 천도를 위해 우선적으로 계획하여 축조된 시설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