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소산성 ( )

건축
유적
국가유산
삼국~조선시대에 축조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에 있는 산성.
이칭
이칭
사비성
유적
건립 시기
삼국-백제
둘레
포곡식성-2,400m, 테뫼식성-790m, 1,570m, 825m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쌍북리 678-2번지 일대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쌍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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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부여 부소산성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북쪽에 위치한 부소산에 조성된 산성이다. 부소산에는 백제~조선시대까지 4개의 성벽이 확인된다. 백제 산성인 포곡식 성은 백제 사비기의 왕성, 배후 산성, 후원 등으로 여겨지며, 부여 나성과 함께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가장 먼저 계획된 도성 시설물로 천도 이전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충청남도 시도 유형 문화유산이다.

정의
삼국~조선시대에 축조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에 있는 산성.
위치

부여 부소산성은 현 부여읍 시가지의 북쪽에 높이 솟아 있는 부소산에 위치한 산성이다. 부소산은 해발 106m의 낮은 산으로 남측을 내려다 보면 사비 도성이 한눈에 조망된다. 부소산의 북쪽과 서쪽은 백마강이 곡류하고, 동쪽은 외곽 성인 부여나성이 연접한다. 부소산 남쪽 끝자락에는 사비기 왕궁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이 있다.

건립 경위 및 변천

부여 부소산성은 사비 도성의 왕성, 방어성, 후원(後苑) 등의 역할을 가지는 산성이다. 『한원(翰苑)』 괄지지에 ‘백제 왕성의 규모가 1리 반이고 북면하고 돌로 쌓았다.’는 기록을 통해 부소산성이 백제 왕성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백제 사비는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왕성과 외곽 성 등을 비롯한 주요 시설물 등의 건립이 먼저 고려되었을 것이고,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대통명 기와를 통해 대통사지가 세워지는 527년경에는 초축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부소산성의 축조와 관련하여 일부 연구자는 486년(동성왕 8) ‘우두성(牛頭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당시 사비 지역의 성곽과 관련하여 ‘소부리성’, ‘사비성’, ‘사비산성’ 등의 기록으로 이를 부소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조선시대에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청산(석)성’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성벽의 규모와 내부 시설의 설명 등으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축성된 테뫼식 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여지승람(輿地勝覺)』에서는 청산성의 폐성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부소산성의 형태와 관련하여 『호서읍지(湖西邑誌)』,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등에는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소산성’이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부여의 진산, 주산과 같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부소산의 지형은 북서쪽(사자루 일대, 해발 107m)과 남동쪽(군창지 일대, 해발 96m)의 두 산봉우리와 그 사이에 남서쪽에서 현재 취수장이 위치한 남동 방향으로 향하는 깊은 곡부로 이루어져 있다.

부소산에는 시기를 달리하는 4개의 성벽이 있다. 먼저, 부소산 전체를 아울러 축조된 포곡식 성은 백제 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둘레는 2,400m이다. 다음으로 북서 봉우리인 사자루 주변을 둘러싼 둘레 약 790m의 테뫼식 성과 남동 봉우리에 있는 영일루와 반월루를 두르고 있는 둘레 약 1,570m의 테뫼식 성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이다. 마지막으로는 군창지를 둘러싼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축조된 둘레 약 825m의 산성이 있다.

부여 부소산성은 현재까지 19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시기를 달리하여 조성된 4개의 성벽 및 성벽 부속 시설(문지, 치(雉), 성벽 내외 시설 등), 성내 평탄지에 조성된 건물지, 용수 시설 등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부소산성의 성벽 중에서 포곡식 성은 판축된 토축 성벽이다. 나무틀을 이용하여 판축을 위한 구조물을 만들고 틀 안에 성질이 다른 흙을 25㎝ 두께로 다져서 쌓았다. 성벽의 잔존 높이는 최대 4m로 확인되며, 너비는 5m 내외이다. 성벽의 구조는 판축된 내외벽이 수직에 가까운 협축 형태가 되도록 토성벽을 조성하고, 일부 구간은 석축하거나 흙을 덧대어서 성벽을 보강하였다. 특히 성 내측은 일정 높이까지 성벽을 보강하기 위한 흙다짐을 했는데 이는 성 안의 지면을 형성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다. 성 내측에는 성벽과 11.5m 간격을 두고 배수를 위한 석축 배수로가 축조되어 있다. 또한, 판축 성벽 하부에서도 성 내측의 유수를 성 밖으로 배출시키기 위한 석축 암거 배수로가 확인된다. 부소산성 성벽에는 일부 구간에서 판축 성벽의 내외 벽면에 얇게 점토를 바른 후 기와를 타일처럼 붙이고 다시 점토를 덧발라서 성벽을 마감하는 시설도 확인되었다.

포곡식 성벽은 판축된 성벽 내외 벽에 일부 성돌을 덧붙여서 증축하거나 석축 배수로 상부로 기와와 흙을 두껍게 쌓아서 개축한 단계가 확인된다. 개축된 성벽 내에서는 백제시대 기와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인화문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포곡식 성벽은 백제 때 초축된 이후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포곡식 성과 관련한 시설은 문지와 치가 있다. 문지는 남문지와 동문지가 조사되었고, 서문지와 북문지는 위치가 추정될 뿐 아직 발굴 조사로 확인되지 않았다. 치는 남문지와 동문지, 추정 북문지 인근의 능선 상에 위치한다.

통일신라시대 산성인 테뫼식 성 중 북서 봉우리에 위치하는 성은 남서-북동 방향으로 긴 형태인데, 성벽의 북쪽은 포곡식 성과 성벽에 접해 있다. 성벽의 외면은 석축으로 만들었고 내측은 판상으로 흙다짐 되어 있다. 석축은 장방형의 석재로 바른 층 쌓기 하였고, 각 단마다 조금씩 들여서 쌓고 있다. 성벽 내측의 흙다짐은 백제시대 판축 토성에 비해 정교하지 못하고 내부에는 기와 편이나 잡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 남동 봉우리에 위치하는 성은 동-서 방향으로 길쭉한 형태로 영일루와 군창지, 반월루 일대를 감싸고 있다. 성벽의 남쪽은 백제시대 성벽과 접하여 있다. 성벽은 판축이나 성토로 조성하였고, 외벽 하단은 석축을 쌓아 마감하였다. 하단 석축은 1~7단 정도 잔존하고 있다. 반월루 일대의 성벽은 백제 포곡식 성벽에 흙다짐을 두껍게 쌓아서 증축한 것으로 확인된다. 통일신라시대 산성인 테뫼식 성에 대한 축조 시기는 성벽 축조 층에서 ‘회창 7년(會昌七年 847년)’명 기와편이 출토되어 9세기 중반 이후에 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마지막으로 군창지를 둘러싼 조선시대 산성은 통일신라시대 테뫼식 성의 성벽을 유지하면서 서쪽만 새롭게 쌓았다. 성벽의 최대 높이는 2.25m, 너비는 8m 정도이다.

부소산은 현재 공원화되면서 성벽을 따라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고, 산 내부 곳곳에서 유적지가 정비되면서 곳곳에 쉼터 등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의의 및 평가

부여 부소산성은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의 배후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으로 위치상 왕실의 후원 역할도 겸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비 도성의 왕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부소산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부소산성의 내부 공간에 대한 조사가 미진한 상태이므로 유적의 성격을 단정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한원(翰苑)』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승람(輿地勝覺)』
『호서읍지(湖西邑誌)』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단행본

『(부여군지 제7권) 부여의 문화유적』(부여군지편찬위원회, 2003)

논문

이미현, 『부여 부소산성의 축조기법과 변천과정-포곡식성을 중심으로-』(전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2)
최지원 ,「부소산성의 발굴조사 성과(1981~2002)」(『부여 부소산성 조사․연구의 새로운 시작』, 국립문화재연구소, 2022)
김대영, 「사비도성 건설의 첫걸음」(『사비 백제사』 제1권, 논형,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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