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림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제4 동성왕 조에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501년(동성왕 23)에 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을 통하여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한동안 주요 거점성으로 활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에 들어와서 가림성은 종묘 제도와 관련하여 소사(小祀)로 편제(『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잡지 제1 제사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지리지 및 읍지에서 가림성과 관련된 기록이 확인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호서읍지(湖西邑誌)』 등에서는 산성은 석성이고, 둘레는 2천 7백 5척이며, 내부에 3개의 우물과 군창이 있었다는 등의 내용이 유사하게 기록된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성흥산성으로 기록되고 있다. 18세기에 기록된 『여지도서』 등에서 ‘금폐(今廢)’, ‘고성(古城)’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가림성은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불리다가 가림성으로 비정(比定)되어 2011년부터 현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가림성은 성흥산의 8부 능선에 설치된 테뫼식 산성인 내성과 내성의 동남쪽으로 이어진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림성의 내성은 석축 산성으로 길이 1,325m, 면적 92,568㎡이며, 외면은 석축을 하고, 내면은 흙으로 쌓았다. 내성의 문지(門地)는 남문 · 동문 · 서문의 3개소가 있는데, 각 문지의 안쪽으로 모두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건물지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각 문지는 등산로와 연결되어 있는데, 남문은 임천면 소재지로, 서문은 부여로 연결되는 한고개로, 동문은 외성을 통과하여 부여 세도 및 강경 쪽으로 연결된다. 우물지는 3개소로 보고되었으나, 현재는 남쪽과 북동쪽 우물지만 확인된다. 수구(水口)는 북성벽 발굴 조사에서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외에도 급경사를 이루는 계곡부마다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집수지는 북성벽 내측부에서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다.
외성은 내성의 동문지 북쪽의 북성벽에서 연결되어 동문지쪽 동성벽으로 이어지며, 규모는 길이 706m, 면적 38,138㎡이다. 지표상의 성벽 붕괴 지점에서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기저부는 석축으로 약 4∼5단 정도 쌓고 내부는 토축한 것으로 보인다. 문지는 남문과 북문이 보고되어 있고 남문지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계단식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문지 내측은 약간의 평탄지가 형성되어 있고, 북동 성벽을 따라서도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건물지로 보인다.
가림성은 2023년 현재까지 내성을 중심으로 9차례 이상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동성벽과 북성벽의 축조 양상, 수 · 개축 성벽의 흔적, 문지의 구조, 북성벽 내측 조사를 통한 성의 배수 체계의 일면이 확인되었다.
가림성 성벽의 축조 방식은 먼저 기저면을 경사 또는 계단식으로 굴착한 뒤 단면 ‘U’자로 도랑을 팠다. 암반의 경우는 턱을 조성하여 석축의 기초석을 쌓은 뒤 그 상면의 외면은 석축과 흙다짐으로 성벽을 조성하였다. 성벽 외면의 면석은 장방형의 성돌을 다듬어서 바른 층 쌓기 하였고, 면석 뒤쪽으로는 일정 너비로 돌을 채워 넣은 뒤, 뒤쪽의 흙다짐은 경사 방향-수평 방향-역경사 방향 등으로 석축된 성벽과 동시에 만들어져 있다. 성벽의 면석은 모서리를 다듬거나 그랭이질 하여 면석 간의 결구면을 더욱 밀착되게 가공하였다. 성벽의 수축은 초축된 이후에 성벽이 폐성되는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고쳐 쌓았다. 동성벽 구간의 경우는 붕괴된 성벽을 제거하지 않고 그 상면에 바로 성벽을 쌓았으며, 북성벽 곡간부 구간의 경우는 초축된 성벽이 붕괴되자 그 앞쪽으로 볼록하게 성벽을 덧붙여 쌓은 흔적이 확인되었다.
가림성의 문지는 남문 · 동문 · 서문의 3개소로 입지적 조건과 축조 양상이 유사하다. 능선의 정상부를 택하여 문지가 조성되고, 성벽을 출입구 내측으로 길쭉하게 연장하여 그 중간쯤에 문루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문지 주변의 성벽은 다른 구간과는 다르게 협축식으로 조성하였고, 성문의 형태는 개거식(開据式)으로 확인된다.
북성벽 곡간부 일대에서는 조선시대 수구와 함께 성 내측에서 조선시대 방형 집수지와 통일신라시대 원형 집수지가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방형 집수지는 내부 규모가 460×440㎝의 크기이며, 내부에서 분청사기 편, 기와 편과 함께 말머리형 토우 편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집수지는 조선시대 집수지의 하층에서 확인되었다. 벽면은 계단식으로 조성되었고, 외곽 배수구가 함께 확인되었다. 규모는 중앙 집수지가 직경 9.7m 정도이다. 이밖에도 북성벽 내측부에서는 초축된 성벽 내측으로 성벽의 진행 방향을 따라 조성된 백제시대 석축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가림성에는 남문지 내측에 천연기념물 제564호로 지정된 성흥산 사랑나무가 자생하고 있고, 고려 초기 유금필(庾黔弼)이 견훤(甄萱)과 대적하다 이곳에 들러 빈민 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 있다.
2023년 현재 가림성은 성벽과 정상부 일대의 잡목이 제거되어 탐방로가 개설된 상태이다.
부여 가림성은 백제 후기 사비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거점 산성으로, 501년(동성왕 23)에 금강 하류인 요충지에 축조된 중요한 백제 산성이다. 특히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옛 지명과 연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