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

계룡산 능선
계룡산 능선
자연지리
지명/지명
차령산맥 중의 연봉으로서 충청남도 공주시 · 계룡시 · 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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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계룡산은 차령산맥 중의 연봉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 계룡시 · 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의 이름은 주봉인 천황봉(846.5m)에서 연천봉(739m) · 삼불봉(775m)으로 이어지는 산봉우리의 능선이 보는 방향에 따라 용의 모습으로도 보이고 닭의 볏 모양으로도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우리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힐 뿐 아니라, 관광지로도 제5위를 차지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계룡산은 『정감록』에 피난지의 하나로 적혀 있는데 이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때 수많은 신흥종교, 또는 유사종교들이 성하였으나 지금은 정리가 되었다.

정의
차령산맥 중의 연봉으로서 충청남도 공주시 · 계룡시 · 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는 산.
개관

높이 846.5m.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차령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가다가 금강의 침식으로 허리가 잘리면서 분리되어 형성된 잔구이다. 지도상으로 대전 · 공주 · 논산을 연결하여 세모꼴을 그린다면 그 중심부에 자리 잡은 것이 계룡산이다. 이 산은 대전에서 서남쪽으로 25㎞ 지점에 있는 동학사 지구와 공주에서 동남쪽으로 19.6㎞ 지점에 있는 갑사 지구로 구분된다. 동경 12.7°7′∼12.7°19′, 북위 36°16′∼36°28′에 있으며, 총 면적은 65.34㎢인데, 공주시에 42.45㎢, 계룡시에 11.9㎢, 논산시에 2.12㎢, 대전광역시에 8.86㎢로 걸쳐 있다.

산 이름은 주봉인 천황봉(天皇峯, 846.5m)에서 연천봉(連天峯, 739m) · 삼불봉(三佛峯, 775m)으로 이어지는 산봉우리의 능선이 보는 방향에 따라 의 모습으로도 보이고 닭의 볏 모양으로도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계룡산은 풍수지리에서도 우리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힐 뿐 아니라, 관광지로도 제5위를 차지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계룡팔경은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삼국시대부터 큰 절이 창건되었으며, 지금도 갑사 · 동학사 · 신원사(新元寺) 등 유서 깊은 대사찰이 있다. 특히, 철 당간 · 부도 · 범종, 각종 석불, 『월인석보』의 판목 등은 현전하는 중요한 불교 문화유산이다. 또, 숙모전(肅慕殿) · 삼은각(三隱閣) 등 충절들을 제사하는 사당과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오누이탑, 그리고 조선 초에 왕도를 건설하다가 중단한 신도안 등 명소가 많다.

이 산은 『정감록(鄭鑑錄)』에 피난지의 하나로 적혀 있는데 이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때 신도안을 중심으로 수많은 신흥종교, 또는 유사종교들이 성하였으나 지금은 정리가 되었다. 계룡산은 공주 · 부여를 잇는 문화 관광지로서, 유성온천과도 연결되는 대전광역시 외곽의 자연공원으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계룡산의 자연환경

계룡산의 지질 · 지형

계룡산 일대의 지질은, 대체로 서북부에 쥐라기의 편마암 · 화강암, 남부 및 동남부에 쥐라기의 복운모(復雲母) 화강암, 그리고 동학사를 중심으로 중앙부에 백악기(白堊紀)로 보이는 홍색 장석화강암이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능선 따라 남북 방향으로 반암류(斑岩類)가 관입하였고, 부분적으로 염기성맥암(鹽基性脈岩)과 산성맥암이 대체로 남북 방향으로 관입하여 산체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계룡산은 지리산에서 뻗어 나온 한 갈래의 산줄기가 덕유산에서 다시 갈라져 300리를 거슬러 올라와, 공주 동쪽에서 반달 모양으로 휘감아돈 형세를 이루고 있다. 차령산맥 중에서도 비교적 험난한 이 산은 유연히 흐르는 금강의 풍치와 어울려 독특한 산악 경관을 이루고 있다. 최고봉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쌀개봉(828m) · 연천봉 · 문필봉(文筆峰, 796m) · 삼불봉 · 수정봉(水晶峰, 662m) 등이 에워싸고 있으며, 이 밖에도 관음봉(觀音峰, 766m) · 막적봉(莫積峰, 664m) · 임금봉(553m) · 형제봉(520m) · 장군봉(將軍峰, 410m) · 도덕봉(道德峰, 524m) 등 크고 작은 20여 개의 봉우리들이 연봉을 이루고 있다.

또한 주능선이 남북으로 크게 뻗은 가운데 다시 서에서 동으로 두 개의 능선이 나란히 뻗어내려 F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들 주요 봉우리 사이의 7개 골짜기에서 발원한 노성천(魯城川) · 구곡천(九曲川) · 용수천(龍水川) · 갑천(甲川) 등이 금강으로 흘러든다. 이 계룡산은 금강을 허리에 두른 채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논산시 두마면, 대전광역시 중구 유성 지역 등에 걸쳐 있다.

계룡산은 풍수지리설에서 대단한 명산으로 꼽아 일찍이 조선 왕조가 이 산 기슭에 도읍 터를 고려해 보기도 하였다. 또한 그 뒤 수많은 신흥 유사종교들이 모여든 것도 계룡산을 풍수설에서 중요시한 때문이었다. 풍수가에 따르면, 용세가 제 몸을 휘감아 제 꼬리를 돌아보는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을 이루었고, 상봉인 천황봉이 형제봉 · 중두봉(中頭峯) · 종봉(終峯)을 이루어 이것을 제자봉(帝字峯)이라 한다.

계룡산은 산형이 수체(水體)로서 동서로 병풍같이 둘려 있고, 산이 북에서 동서로 싸안으니 두 쌍의 봉황이 서로 희롱하는 형상이요, 흙빛이 바래서 흑기(黑氣)를 벗으니 백옥이 되었다고 한다. 힘차게 뻗어 내린 주룡이 북으로 가니 한줄기 한줄기가 조각난 황금 같고, 청룡은 겹겹이 감싸서 주봉을 호위하고 백호는 국사봉(國師峯)의 호랑이가 얌전히 엎드린 형상이라 한다. 다시 안쪽을 내려다보면 멀리 장군봉 · 천쌍봉(天雙峯) · 함지봉(咸芝峯) · 함박봉(咸朴峯) 등이 주봉을 향하여 하례하니 군신이 다정하다.

수세는 골육수(骨肉水)로 좌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앞으로 모여 양수합금(兩水合襟)을 이루었고, 주위 봉우리들은 사방에서 사신팔장(四神八將)이 둘러싸 나성(羅城)을 이루었으며, 삼길육수방(三吉六秀方)의 영봉들이 정기를 내뿜어 신도안을 비추는 형국이라 한다.

계룡산의 기후

기온연교차는 -20℃∼35℃로 연평균 11℃를 보이고 있다. 연중 주풍향은 서북풍이고, 여름에는 남동풍 또는 남서풍, 겨울에는 북풍, 봄에서 초여름까지는 북북서풍이 불고 있다. 강우량은 연중 6∼9월에 90%가 집중되고, 12월이 가장 적게 나타난다. 연강우량은 1,280㎜이며 하루 동안의 최대 강우량이 1974년 229㎜까지 이른 바 있다. 높이 500m 이상의 능선 사이에 있는 계곡으로 미기후(微氣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어 일교차가 심하며, 서리는 10월 중순부터 다음해 4월 중순까지 6개월 정도 내리며, 결빙 기간은 10월 하순부터 다음해 4월 중순까지이다.

계룡산의 생태

동식물 분포는 식물이 860종, 포유류 25종, 조류가 52종, 곤충류가 1,184종, 양서 · 파충류 16종, 담수어 25종 등으로 약 2,100여 종의 동식물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물에는 황매화 · 팽나무 · 벗나무 · 회나무 · 느티나무 등이 있고, 산짐승에는 노루 · 담비 등, 조류에는 딱다구리 · 까치 · 두견이 · 뻐꾸기 · 왜가리 등, 곤충류에는 참매미 · 호랑나비 · 여치 등, 기타에는 두꺼비 · 청개구리 · 살모사 등이 있다. 계룡산의 수목 분포는 54% 이상이 침엽수이고, 활엽수가 6%, 나머지 40%는 떨기나무덤불이다.

관다발식물[管束植物]은 양치류(羊齒類)가 12과 23속 38종 3변종이고, 나자식물(裸子植物)은 5과 12속 20종 1품종이며, 속씨식물[被子植物]은 102과 372속 612종 8아종(亞種) 146변종 24품종으로 충청남도에서 사는 식물 중 76%나 차지하고 있다. 한편, 관다발식물 중 목본은 304종으로, 그 중 뽕피나무 · 털피나무 · 합다리나무 · 예덕나무 · 고광나무 · 오동나무 · 참느름나무 · 딱총나무 · 참조팝나무 · 산앵도나무 · 회양목 · 긴잎회양목 · 소사나무 · 말채나무 · 개비지나무 · 단풍나무 · 지포나무 · 청복분자딸기 · 복분자딸기 등 19종이 한국 특산이고, 초본은 528종으로 좀닭의장풀 · 개맥문동 · 골잎원추리 · 금관초 · 벌개미취 · 산바랭이 등 6종이 한국 특산종이다.

이끼식물[蘚苔植物]은 25과 38속 58종으로 이 중 선류(蘚類)가 11과 11속 15종, 태류(苔類)가 14과 27속 38종이다. 이끼식물은 하천이 흐르는 동학사 · 갑사 · 신도안 주변에서 각각 43종, 37종이 분포되어 있다. 균류(菌類) 중 담자균(擔子菌)은 광대버섯속 · 그물버섯속 · 젖버섯속 · 낙엽버섯속 · 주름버섯속 등이 우점종(優占種)이다. 식용버섯으로는 향버섯(능이) · 넓은솔버섯 · 싸리버섯 · 바늘싸리버섯 · 나무싸리버섯 · 꾀꼬리버섯 등이 분포되어 있다.

동물 중 포유류에 대하여 충남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가 1981년 10월, 현지 조사와 주민들의 상황 청취를 통하여 작성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두더쥐와 오소리가 굴속에서, 족제비가 개울가나 인가에서 발견되었고, 고슴도치도 상당수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묘포장에 해를 끼치는 고라니 · 노루도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류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팔색조와 계룡산 산정에서 발견된 큰부리까마귀가 가장 특이한 것이다. 동학사에서 갑사 사이의 우점종으로는 흰배지빠귀 24.64%, 박새 16.36%, 산솔새 10.9%이고, 백암동에서 신원사 사이의 우점종은 흰배지빠귀 15.69%, 붉은머리오목눈이 13.73%로 나타나 있다.

계룡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계룡산은 예로부터 계람산(鷄藍山) · 옹산(翁山) · 서악(西嶽) · 중악(中嶽) · 계악(鷄嶽) 등 여러 가지 이칭으로 불렸다. 중국의 문헌에도 당나라 장초회(張楚會)의 『한원(翰苑)』 백제조에 ‘계룡동치(鷄龍東峙)’니 ‘국동유계람산(國東有鷄藍山)’이니 한 것은 모두 이 산을 가리킨 것이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이른바 ‘ 신라5악’ 중의 서악으로서 제를 올려 왔다. 조선 시대에는 묘향산의 상악단(上嶽壇),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이 산에 중악단을 설치하고 봄가을에 산신제를 올렸다. 계람산이라는 이름은 계곡의 물이 쪽빛같이 푸른 데서 나온 것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4대 명산 또는 4대 진산이라고 일컬어 왔으므로 역사가 얽힌 유적과 유물이 많다. 그 중 갑사와 동학사가 유명하다. 갑사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절로서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이다. 420년(구이신왕 1)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4년 인호(印浩)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갑사 철당간갑사 승탑, 1978년 보물로 지정된 갑사 동종, 석조약사여래입상 · 석조보살입상 · 사적비 · 표충원 · 공우탑 · 대적전 · 천불전 등을 비롯하여 31개의 『월인석보』 판목 등이 있다. 갑사에서 용문폭포를 따라 1.3㎞쯤 오르면 왼쪽에 신흥암(新興庵)이 있고, 그 뒤쪽에 천진보탑(天眞寶塔)이 있다. 이 천진보탑은 천연 석탑으로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전한다.

갑사와 등지고 있는 동학사는 비구니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 때 회의(懷義)가 그의 스승 상원(上願)의 사리탑을 세우고 창건하였으며, 절 동쪽에 학바위[鶴巖]가 있어서 ‘동학사’라 하였다. 이 절에는 김시습(金時習)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냈던 숙모전과 길재(吉再)공민왕정몽주(鄭夢周)를 제사지냈던 삼은각이 있다. 갑사 대웅전으로 가는 다리 밑 계곡에는 군자대(君子臺)가 있는데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 오경감(吳景鑑)이 퇴관한 뒤 이곳에 와서 울창한 수목과 기묘한 암석 사이를 굽이치는 맑은 물을 보고 가히 군자가 수양할 만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원사(新元寺)는 계룡면 양화리에 있는 고찰이다. 652년(의자왕 12) 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절 이름은 본디 신정사(神定寺)라 하던 것을 뒤에 신원사(神元寺)라 하였다가 1885년(고종 22)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경내에는 동쪽에 중악단(中嶽壇), 동남쪽에 5층석탑이 있다. 중악단은 신라 시대 이래의 산신 제단으로 조선 초에는 무학(無學)의 현몽으로 태조가 이곳에서 계룡산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단은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산신 제단으로써 1879년에 중수하였다.

그리고 이 절의 부속 암자인 고왕암(古王庵)은 660년에 창건하고 1419년에 중건한 암자로, 백제 말에 의자왕이 이곳에 숨었다가 소정방(蘇定方)에게 붙잡혔다는 전설이 있다.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는 도중의 청량사(淸凉寺) 터에는 남매탑(男妹塔)이라는 두 개의 탑이 있는데, 7층탑을 오라비탑이라 하고 5층탑을 오누이탑이라 하여 합해서 오누이탑으로 불린다. 이 탑들은 고려 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하나, 백제석탑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얽혀 있다.

백제의 왕족 하나가 이곳에 와서 수도하고 있을 때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호랑이를 구해주었더니, 호랑이는 며칠 뒤 예쁜 처녀 하나를 업어왔다. 왕족은 그 처녀를 고이 돌려보냈으나, 그 부모가 딸을 다른 데로 시집 보낼 수 없다 하고 다시 왕족에게로 보냈다. 왕족은 하는 수 없이 누이로 맞이하여 남매가 함께 수도하여 마침내 성도하였다. 그들이 죽은 뒤 몸에서 많은 사리가 나와 사람들이 이 탑을 세워 오누이를 공양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조는 이곳으로 천도하기 위해서 궁궐 영조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조운(漕運)의 불편 등 왕도로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에 따라 중단하였으며, 지금도 부남리에는 초석으로 다듬어진 암석이 94개나 있어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그곳에는 동문거리 · 서문거리 등의 지명과 함께 신도 역사의 인부들이 일을 마치고 짚신을 털어 봉우리가 되었다는 신터리봉도 있다.

사적지와 명승지로서 널리 알려진 계룡산에 신비감까지 보태준 것이 곧 『정감록』이다. 이 책은 여러 이본이 있어 종잡을 수 없는 대목도 많은 것 같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완산백(完山伯)의 두 아들 이심(李沁)과 이연(李淵)의 형제가 정공(鄭公)이라고 일컬어진 사람과의 문답을 중심으로 한 「감결 鑑訣」이 있다. 그 밖에는 세전(世傳)하는 예언적 문서들을 한데 묶어놓은 것인 만큼 통일성이나 일관성이 없는데 있는 그대로 계룡산에 관한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정감록』에 적힌 계룡산은 크게 미래의 도읍지라는 것과 피란지라는 것의 두 가지로 집약된다. 먼저 도읍지로서는 「감결」에서 이심이 “……산천의 뭉친 정기가 계룡산에 들어가니 정씨 800년의 땅이다.”라고 하여 한양에 도읍한 이조 500년이 지나면 계룡산에 도읍한 정조(鄭朝) 800년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이어서 정공은 “계룡 개국에 변(卞)씨 재상에 배(裵)씨 장수가 개국원훈이고, 방(房)씨와 우(牛)가가 수족과 같으리라.” 하여 개국의 상황까지를 구체적으로 내다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체적 예언은 「감결」의 부록인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祕記)」에도 “계룡산에 도읍지가 있으니 정씨가 이곳에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복덕(福德)은 이씨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밝고 의로운 임금이 많이 나와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피란지로서는 장차 ‘12년 병화’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큰 변란이 일어나는데, 그 시기를 암시하는 말들 가운데 ‘계룡의 돌이 희어질 때’라 하였다. 이런 큰 난리를 피하여 살아남을 곳으로 이른바 ‘십승지’라는 것을 열거하였는데, 그 중 계룡산 또는 계룡산 인근 지역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승지는 「감결」에 두 군데 외에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蓭山水十勝保吉之地)」 등에 보여 지명도 들쭉날쭉 일정하지 않다. 처음 나온 십승지에서는 계룡산이 아예 빠져 있으나, 이어서 여러 문답 끝에 “계룡산의 남쪽 바깥의 네 고을 또한 인민이 보신할 만한 곳이다.”라 하였다. 두번째 나온 십승지에는 “공주 계룡산 유구(維鳩) 마곡(麻谷) 양수지간의 둘레 200리 안은 가히 난리를 피할 만하다.”고 명기하고, 다시 “동북 정선현(東北旌善縣) 상원산(上元山) 계룡봉(鷄龍峯) 또한 가(可)하다.”고 하였다.

남격암은 십승지에는 넣지 않았으나 그 밖의 ‘장신지소(藏身之所)’라 하여 17개의 명산을 적었는데 그 열 번째에 계룡산을 들었다. 이와 같이, 계룡산은 문서에 따라 십승지에 들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였으나 빠진 경우에도 그냥 빠뜨리기가 아쉬워 꼭 언급하고 넘어간 것을 보면, 역시 피란지로서 공인을 받았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어떻든, 한말부터 세태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정감록』 등의 도참설에 매혹되어 계룡산에 관심을 점차 가지기 시작하더니, 민족 항일기 말기에 들어서는 무속 등 전래의 토속 신앙을 비롯하여 각종 신흥종교 및 유사종교가 계룡산 신도안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중 주류를 이룬 것은 동학(東學)과 정역사상(正易思想)이었다. 이들 신봉자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수도장으로서 피란처를 겸하여 들어왔으나 차차 종교적 형태를 갖추어 가면서 분파에 분파를 거듭하여 수없는 유사종교의 집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처음 동학계통의 시천교(侍天敎) 교주 김연국(金演局)이 1912년 신도안을 답사하고 이듬해 많은 토지를 사들였다. 그러다가 1920년 교당을 신축하여 이듬해 시천교의 본부를 그곳으로 옮긴 뒤 각종 신흥종교가 따라 들어오거나, 이곳에서 새로 일어나고 분열되고 하면서 마침내 계룡산은 사교의 요람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문학 · 예술에 나타난 계룡산

계룡산은 비록 웅장한 산은 아니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골물이 쪽빛처럼 맑아서 멀리 보면 전체적 인상이 푸르게 보이고, 가까이 보면 그윽하여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래서 예로부터 온갖 종교가 번성하여 수도장이 되었고, 명당이니 피란처니 하여 도참설이 성행하기도 하였으며, 또 시인 묵객을 비롯한 탐승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계룡산은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종교적 성지가 되기도 하며, 관광의 명소로서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중환(李重煥)『택리지』에서 경도진산(京都鎭山)으로 개성의 오관산(五冠山), 한양의 삼각산(三角山), 진잠(鎭岑)의 계룡산, 문화(文化)구월산(九月山)의 넷을 들고,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는 가운데 계룡산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계룡산은 웅장하기가 오관산에 미치지 못한다. 골짜기가 깊숙하게 들어앉은 것이며, 국(局) 안 서북쪽에 용연(龍淵)이 있어 심히 깊고 넓게 흘러서 국 안에 큰 시내를 이룬 것은 개성이나 한양에는 없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갑사 · 동학사 등 명승지를 소개하였다.

옛 사람들이 일러온 ‘공주십경’ 중에 ‘계악한운(鷄嶽閑雲)’을 꼽았거니와, 성종대의 문인 서거정(徐居正)은 이에 대하여 “계룡산 높이 솟아 층층이 푸름 꽂고 맑은 기운 굽이굽이 장백(長白)에서 뻗어왔네/산에는 물 웅덩이 용이 서리고 산에는 구름 있어 만물을 적시도다/내 일찍이 이 산에 노닐고자 하였음은 신령한 기운이 다른 산과 다름이라/때마침 장마비가 천하를 적시나니 용은 구름 부리고 구름은 용을 좇는도다.”고 읊었다.

또, 세종조의 학자 남수문(南秀文)은 「독락정기(獨樂亭記)」에서 “남쪽으로 계룡산을 바라보니 은하수 위로 솟아난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숙종영조조의 학자 남하정(南夏正)의 「계룡기행」이 그의 문집 『동소유고(桐巢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상황과 비교하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침에 동학사를 찾았다. 동학사는 계룡산 북쪽 기슭에 있는 옛 절인데, 양쪽 봉우리에 바위가 층층으로 빼어나고 산이 깊어 골짜기가 많으며, 소나무와 단풍나무와 칠절목(七絶木)이 많다. 지금은 절이 절반쯤 무너지고 중이 6, 7인 뿐인데, 그나마 몹시 용렬해서 옛일을 이야기할 만한 자가 없다. ……물을 따라 동구를 나와서 남쪽으로 밀묵령(密默嶺)을 넘으니 이것이 신도(新都) 북문이다.

아래로 전목정(栴木亭)에 이르니 나무는 불에 타고 반쯤 남았는데도, 그 그늘이 소 열마리는 가릴 만하니 그 크기를 알겠다. ……봇도랑의 옛 제도를 찾아 보노라니 절터에 옛 주춧돌이 보인다. 패사(稗史)를 상고하건대 우리 태조 2년에 도읍 터를 이 신도에 잡고 성을 쌓고 대궐을 세울 계획을 세웠는데, 어느 날 밤 꿈에 상제가 불길하다고 현몽하므로 이를 취소하고, 대신 한양에 터를 정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곧 그때의 남은 터이고, 지금도 이곳을 ‘신도’라고 하는 것은 이 까닭이다.”

다음으로 현대의 한학자 김철희(金喆熙)는 계룡산 시에서 “한 번 계룡산에 오르니 만산의 꼭대기인데, 여기 서서 황도(皇道)가 크게 열리는 때를 보네/곤륜산의 원기가 뻗어오기를 멀리하였고, 황해의 정신이 와서 모이기를 멀리하였네. /안으로 불교요 밖으로 유교를 믿는 것이 까닭이 있고, 하늘을 높이고 땅을 낮추는 것이 이치가 모두 그렇겠도다 /내가 온 것은 아름다운 경치 보려는 것뿐이 아니라, 산신령께 빌어 함께 신선이 되려는 것이었네/거꾸로 계룡산에 오르니 높다랗게 하늘에 닿았는데, 사방으로 둘러싸인 모든 산이 비단 병풍과도 같네.”라고 찬양하고, 이어서 계룡산에 대한 시편들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우리나라 공주에 있는 산을 이름하여 계룡산이라 하는데, 그 산의 생김새가 엄연하고 따뜻해서 마치 군자가 예양(禮讓)하는 모양과 같으며, 아름답고도 곱고 덕이 맑은 가인(佳人)의 고요하고 한가로운 얼굴과 같으면서도, 높고도 커서 호걸스럽고 잘난 선비가 우뚝 서서 건드리지 못한 것만 같다. 이 태조가 도읍 터 공사를 시작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정여립(鄭汝立)의 불령스러운 옥사가 있었으니 그 신령스러운 기운이 평범하지 않은 것은 비록 아는 자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이장(李丈)이 이 산 속에 수년 동안 살면서 봉우리 이름과 물의 명칭의 연유와 대(臺) · 바위 · 절 · 민사(民社) 등의 토속 유래까지를 다 조사하고, 가는 곳마다 절구(絶句) 한 수씩 지어 이것을 합쳐서 『계룡시첩(鷄龍詩帖)』이라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한 걸음도 걷지 않고서 산의 안팎 모든 명승을 빼놓지 않고 볼 수 있게 하였으니, 그 마음씀이 가히 넓다고 하겠다.”

계룡산의 자원

계룡산의 부존자원

계룡산의 산지는 대개가 키 작은 나무로 구성된 산림지대이고, 갑사 · 동학사 · 신원사 등 큰 사찰 부근에 땔나무 숲이 약간 산재해 있다. 농경지는 산 주위의 계룡면과 반포면 계곡에 전답이 약간 있어 · 보리 · 과 그 밖에 약간의 과수가 재배되고 있다. 광산 자원으로는 공주시 반포면 하신리에 연간 생산량 1,800t 규모의 아연광(亞鉛鑛)이 있었으나 10여년 전부터 채광이 중단된 채 폐광되었다.

계룡산의 관광자원

계룡산의 자원적 가치는 관광자원이 으뜸이다. 계룡산은 봄철의 춘산백화(春山百花), 여름철의 녹음방초, 가을철의 만산홍엽, 겨울철의 심계백설(深溪白雪) 등 철마다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은 용문(龍門)과 은선(隱仙)의 두 폭포를 이루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1964년 우리나라의 8대 관광지를 인기 투표하였을 때 계룡산은 제5위를 차지할 만큼 손꼽히는 명승지로서, 1968년 12월 31일자로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의 국립공원이 되었다. 교통편은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서울 · 대전 · 대구에서 3시간 이내에 갈 수 있고, 대전 및 공주에서 시내버스가 내왕하고 있어 비교적 편리하다.

계룡산에는 백제 문화의 유적과 대찰, 그리고 명승지가 많아 역사 관광 또는 자연 관광지로서 좋은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다. 산의 모습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골짜기마다 푸른 늪이 있고, 시원한 폭포가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또, 세 곳의 큰 절이 동학사는 동쪽에, 갑사는 서북쪽에, 그리고 신원사는 서남쪽에 알맞게 배치되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계룡산 안에는 지정유산이 15점, 비지정유산이 13점이 있고, 크고 작은 사찰이 22개소나 있다. 자연경관으로는 산봉우리가 15개, 계곡이 7곳, 폭포가 3곳, 이름난 암굴도 5곳이나 된다.

그 중에서도 계룡팔경은 대표적인 관광 명소인데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제1경은 천황봉의 일출로 계룡산의 최고봉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에 그림 같은 조망이 펼쳐진다. 특히, 아침에 보는 해돋이는 너무도 장엄하여 가히 첫 손가락을 꼽을 만한 장관이다. 제2경은 삼불봉의 설화(雪花)로, 삼불봉은 세 부처님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곳 나무숲에 눈이 쌓이면 신비로운 경관을 이룬다.

제3경은 연천봉의 낙조로, 산 높이로는 계룡산 중 여섯 번째이지만 산 모양이 준수하기로는 으뜸이다. 갑사계곡과 신원사계곡을 좌우로 두고 우뚝 솟아 발 아래에 상원들과 계룡지 · 경천지 등의 절경을 안고 있다. 이곳의 지는 해는 천황봉의 일출과 쌍벽을 이루는 장관이다. 제4경은 관음봉의 한운(閑雲)으로 관음정에 누워 한가로이 떠다니는 흰 구름을 바라보면 세상사가 한낱 물거품과 같다 한다. 여기서 쌀개봉으로 이어진 철쭉 길은 관음봉의 자랑이다. 공주십경의 하나인 ‘계악한운’은 곧 관음봉의 한운을 가리킨 것이다.

제5경은 동학계곡의 신록으로, 학바위 앞에서 관음봉 고개까지 3.5㎞에 이르는 계룡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흔히 ‘춘 동학, 추 갑사’라 하는데, 이 계곡의 울창한 숲에 신록이 돋아나면 온 산에 생기가 약동한다. 제6경은 갑사계곡의 단풍으로 계룡산 단풍은 널리 알려진 가경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갑사를 싸안고 오리숲에서 금잔디고개에 이르는 갑사구곡의 단풍은 마치 불타는 듯하여 가을 계룡의 으뜸 가는 경관이다.

갑사구곡은 남쪽으로 난 계곡에 있는데 ① 용유소(龍遊沼), ② 이일천(二一川), ③ 백룡강(白龍崗), ④ 달문택(達門澤), ⑤ 군자대(君子臺), ⑥ 명월담(明月潭), ⑦ 계룡명암, ⑧ 용문폭포, ⑨ 수정봉이 그것이다. 특히, 제6곡인 명월담에는 취사장이 마련되어 있고, 왼쪽 바위 밑에 석조약사여래상이 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용문폭포를 거쳐 금잔디고개 · 오누이탑 ·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연천봉 · 관음봉 · 은선폭포를 지나 동학사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제8곡인 용문폭포는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절경이며, 제9곡인 수정봉은 이름 그대로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산이다.

제7경은 은선폭포의 운무(雲霧)로 동학사 계곡을 거슬러 오르다가 약 20m 높이에서 내리 쏟아지는 물줄기는 동학계곡의 유일한 폭포이기도 하다. 폭포 앞의 기암절벽은 자연경관의 극치이고, 그 너머로 멀리 보이는 쓸개봉의 위용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옛날에 신선이 숨어 살았대서 이 이름이 생겼다 한다. 제8경은 오뉘탑의 명월로 오뉘탑은 남매탑이라고도 하나 제대로의 이름은 청량사지쌍탑(淸凉寺址雙塔)이다. 삼불봉의 기슭에 있는 이 탑은 둘이 한 쌍을 이루는데, 큰 탑은 화강석조의 7층탑으로 상륜부는 결실되었고, 작은 탑은 원래 5층탑이었으나 4층까지만 남아 있다. 이 작은탑은 부여의 정림사지석탑(定林寺址石塔)을 충실히 모방한 걸작품이다. 이들 탑에 얽힌 의남매전설을 생각하면 숲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은 신비감에 젖게 한다.

이들 팔경 외에도 용추폭포 등 명승지가 많다. 용추폭포는 신도안에서 신원사 쪽으로 2㎞ 지점에 용이 승천하였다는 숫용추가 있고, 동북쪽 용화사(龍華寺) 쪽으로 3.2㎞ 지점에 암용추가 있어 이 두 폭포를 아울러 이른다. 이곳은 영험한 곳이라 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계룡산에는 갑사 입구의 갑사저수지(또는 계룡저수지)와 신원사 입구의 신원사저수지(또는 경천양화저수지)가 있어 공해 없는 낚시터를 찾아 낚시꾼들의 사랑을 받는다.

계룡산에는 여러 개의 등산 코스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두 길이다. 제1코스는 주차장 · 동학사 · 오누이탑 · 금잔디고개 · 신흥암 · 용문폭포 · 갑사 · 주차장으로 이 코스는 총 8㎞에,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이 길은 거꾸로 갑사에서 시작하여 동학사로 나가도 좋다. 제2코스는 주차장 · 동학사 · 은선폭포 · 관음봉 · 연천봉 · 갑사 · 주차장으로 총 8.8㎞에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계룡산을 찾는 관광객은 유성온천에 온천욕을 겸해서 가기도 하고, 또는 대전국립묘지 참배를 겸해서 가기도 한다.

계룡산의 현황

국립공원 계룡산 지구의 자연환경 및 관광자원 보호를 위하여 일대 5m에 걸쳐 자연환경 보호지구를 설정하고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의 진입로의 건설 및 확장, 그리고 도로의 포장을 서둘러 시행하였다. 계룡산에는 현대 시설 지구가 있는데 삼불봉과 관음봉을 중심으로 동쪽에 동학사 지구와 서쪽에 갑사 지구의 두 집단 시설지가 있다.

계룡산은 우리 국토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어 전국 어디에서나 접근하기 쉽고, 역사적 · 자연적으로 우수한 관광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서 탐방객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공주 · 부여 등을 연결하는 문화 유적 관광축으로, 계룡산 국립공원과 주변의 휴양지인 칠갑산 도립공원 · 대둔산 도립공원 등과 상호 연계되기 때문에 다양한 관광권을 형성하고 있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택리지(擇里志)』
『정감록(鄭鑑錄)』
『독락정기(獨樂亭記)』
『동소집(桐巢集)』
『계룡시첩(鷄龍詩帖)』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한국의 명산대찰』(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한국의 산천』(손경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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