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경질(景質)·경소(景素), 호는 경재(敬齋). 할아버지는 공안부윤(恭安府尹) 남기(南奇)이고, 아버지는 병조참판 남금(南琴), 어머니는 부령(副令) 이춘명(李春明)의 딸이다.
1426년(세종 8)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36년 중시 문과에 장원해 문명을 널리 떨쳤다. 문과에 급제한 해에 집현전의 정자(正字)가 되었다.
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의 명을 받고 학문에 정진했다. 1433년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서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435년 간행한 『통감훈의(通鑑訓義)』의 편찬에도 참여해, 윤회(尹淮)·권채·정인지(鄭麟趾) 등과 『통감(通鑑)』을 주해하기도 했다.
143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한 직후 집현전응교를 제수받았다. 1437년 집현전에서 편찬한 『장감박의(將鑑博義)』의 발문을 썼고, 이듬해한유(韓愈)의 문장에 대한 주석서의 발문도 썼다.
그 뒤 예문관응교·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거쳐, 1442년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지제교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지었으나 대다수의 글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전하지 않는다.
다만, 1442년흥천사(興天寺)를 짓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 때 지은 설선문(說禪文) 등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하고, 몇 편의 전(箋)·기·묘지 등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할뿐이다.
줄곧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고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 윤회·권채·신석조 등과 시문을 겨루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남수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앙했다.
술을 즐겨 도가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세종은 재주를 아껴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경계했다는 일화가 있다. 저서로는 『경재유고(敬齋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