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3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1~660년이며 무왕의 맏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들과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 불렸다. 대내적으로는 유교를 통해 집권력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그런데 고구려 공략에 실패한 당이 신라와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분전했으나 대패하고 항복 후 왕자·대신·장병·백성들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가 며칠 뒤 사망했다.
무왕(武王)의 맏아들로 태어나 무왕 33년(632)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이 615년 태어난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의자왕은 적어도 590년대 중반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41년 무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따라서 왕에 즉위할 당시 나이는 적어도 40대 중반이 넘은 완숙한 나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642년 왕의 어머니가 죽자 아우 왕자의 자식인 교기(翹岐)를 비롯해 어머니 자매의 딸[母妹女子] 4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였다. 이 사건은 “큰 난리가 일어났다”고 기록하였으므로 정변(政變)이라 할 만하다.
최근 발견된 「미륵사사리봉안기명문(彌勒寺舍利奉安記銘文)」에서는 무왕 40년(639) 당시의 백제 왕후가 사택(沙宅)씨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의자왕의 친모(親母)와 태자 임명, 사택씨와의 관련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의자왕 초기 정변이 친정체제(親政體制)를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친고구려정책(親高句麗政策)으로 전환하는 기폭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이 친고구려정책을 추진한 것은 중국 대륙에서의 통일 제국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분열된 중국은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통일 왕조인 수 · 당(隋 · 唐)은 이웃 나라에 복속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주변 나라는 수 · 당에 복속하느냐 아니면 자주적인 노선을 견지하느냐 하는 선택에 직면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에 반발하여 수와 전쟁을 하였고, 당이 들어서자 화친(和親)을 청하는 등 국면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여전히 당의 압박은 거세졌다. 이러한 시기에 집권한 의자왕은 당의 팽창주의(膨脹主義)가 한반도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고구려가 백제를 막아줄 수 있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친고구려정책을 취한 것이다. 고구려 또한 백제의 대외정책 변화에 부응하여 대당강경파(對唐强硬派)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집권하였다.
의자왕이 노린 또 다른 측면은 두 나라(고구려 · 백제)가 화해함으로써 신라를 고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대륙의 외풍을 막아냄과 동시에 경쟁국인 신라를 고립시킴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했던 것이다. 의자왕은 642년 7월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 성(城)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가는 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킴으로써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신라는 이를 돌파하고자 고구려와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에 의존함으로써 국가의 어려운 난관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백제 또한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여 신라의 대중국 통교(通交)를 위협하였다. 645년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당에 협조하자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의 7성을 공격하였다. 이는 실리정책(實利政策)을 취한 의자왕대 대외정책의 일면을 보여준다. 647년 신라에서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 연합세력이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압하고 집권하면서 친당정책(親唐政策)을 수립한 것도 신라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또한 일본 열도에서도 645년 전횡하고 있었던 소아(蘇我)씨 일족을 주살하고 천왕의 친정체제를 강화한 타이카 개신(大化改新)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당의 팽창주의에 주변 나라가 소용돌이를 치는 가운데 의자왕은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은 실리정책을 취한 것이다.
다음으로 의자왕은 유교(儒敎)를 통해 집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의자’라는 이름 자체가 유교적 색채가 짙으며, ‘성충(成忠)’ · ‘의직(義直)’ · ‘윤충(允忠) 등 신하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집권 초기에 주 · 군(州郡)을 순무(巡撫)하거나 죄수를 사면한 것도 유교에서 말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와 통한다. 따라서 의자왕은 친정체제를 강화하면서 유교적 정치를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이와 같이 대내외적인 개혁을 통해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신라와의 전쟁에 우위를 점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당은 645년과 647∼648년 연이은 고구려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그것은 고구려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는 백제를 차단하여 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라인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651년 당은 백제에게 신라와 싸우지 말고 협력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응분의 대가가 따를 것임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백제는 655년 고구려 · 말갈(靺鞨)과 함께 신라 북쪽의 30여 성을 빼앗았다. 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의자왕이 당이 아닌 고구려 편에 섰던 것임을 나타내준다. 이 시기 고구려와 백제가 대규모 사절단을 야마토(大和) 정부에 보낸 사실도 세 나라의 협력 관계를 말해준 것으로 본다.
공교롭게도 655년 시점부터 백제 멸망에 관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라를 공격하기 직전에 붉은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 오합사)로 들어가 울면서 불당을 돌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오함사는 전쟁에 희생된 원혼들이 불계(佛界)에 오르기를 기원하면서 세운 사찰로, 하필 이곳에서 전쟁과 관련된 말이 죽은 것은 범상치 않은 징조였다. 656년성충이 전쟁을 예언하며, 기벌포(伎伐浦)와 탄현(炭峴)을 방비할 것을 권고하며 옥사(獄死)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실제 655년을 기점으로 의자왕 정권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때 정치의 일선에 나선 인물이 군대부인(君大夫人)인 왕비이다. 왕비의 등장은 의자왕 집권 초기에 소외되었던 왕족들의 권력 장악으로 보고 있다. 이에 주목하여 지배층의 분열 혹은 공적 권력의 성장이 없었던 것을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또한 태자가 부여융과 부여효(扶餘孝)로 병기된 것에 주목하여 태자 교체와 관련된 정치 변동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비하여 신라는 김춘추의 집권 이후 당의 의관제(衣冠制) 도입과, 연호의 사용 등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당이 친신라정책(親新羅政策)으로 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55년 백제가 당의 통첩을 무시하자 백제를 먼저 정벌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당의 백제 정벌은 이미 659년에 준비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659년부터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가 백제 멸망 관련기사로 일관한 것은 이를 대변해준다. 당이 659년 파견된 일본 사신 사카이베노무라지이하시키[坂合部連石布]를 억류한 것도 이미 당에서 전쟁을 준비하였던 사실을 확인해준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660년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13만 대군이 황해를 횡단하여 기벌포에 상륙하였다.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는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을 황산벌(黃山伐)에서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두 나라의 군대가 합류하여 7월 12일 사비성(泗沘城)을 포위하였다. 의자왕은 7월 13일 견고한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둘째 아들 부여태(扶餘泰)와 손자 부여문사(扶餘文思)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겨 사비성이 맥없이 무너졌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 및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예식진(禰寔進) 묘지명(墓誌銘)에 주목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웅진방령 예식(禰植)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투항하였다”는 새로운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와 같이 급작스러운 의자왕 정권의 붕괴는 전쟁이 사비도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관계로 지방세력이 온존하여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8월 2일 의자왕은 나당연합군 측과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9월 3일에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 · 부여융 · 부여연(扶餘演) 및 대신 ·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갔다.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은 60대 중반이 넘은 상당히 연로한 나이였다. 그해 11월 1일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당 고종(高宗)을 만나 사면을 받았지만 지친 여정과 나라를 빼앗겼다는 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며칠 뒤에 병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부여융은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되어 재기를 도모하였지만 백제의 고토(故土)를 신라에게 상실하여 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 묘지명이 발견되어, 의자왕의 후손들이 중국에서 백제 유민의 명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이 즉위하자 당 태종(太宗)은 사부랑중(祠部郞中) 정문표(鄭文表)를 보내 책봉하여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柱國 帶方郡王 百濟王)’으로 삼았다. 왕이 병들어 죽자 당 고종은 ‘금자광록대부 위위경(金紫光祿大夫 衛尉卿)’으로 추증하고 옛 백제 신하들이 장사지내도록 허락하였다. 당 고종은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의자왕의 시신을 묻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