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665년(보장왕 24)에 사망했다. 동부 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당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과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개금(蓋金 또는 盖金)이라고도 하며,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고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고, 아버지는 태조(太祚)이며,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지위에 올랐다고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씨는 중국측 기록에는 ‘천(泉)’ 또는 ‘전(錢)’이라 되어 있는데, 이는 연(淵)이라는 글자가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인 이연(李淵)과 같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이 천(泉)으로 나오는 것은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의 전부가 중국기록에 의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연(淵)이라는 성도 거기에서 유래된 것 같다. 샘이나 내[川], 또는 호수의 정령(精靈)을 두려워하고 공경해, 이를 자신들의 시조와 연결시키는 것은 고대 동북아시아 제 민족의 설화와 신화에서 일반적으로 보인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했다고 한다. 동부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였다.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했으나 귀족들에게 호소해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뒤에 그는 천리장성을 쌓을 때 최고 감독자가 되었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챈 그는 642년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부른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해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스스로는 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안시성(安市城)의 성주도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간의 타협으로 일단락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했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다. 안시성주와의 타협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 연립정권 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선임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임했고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여의치 않으면 각기 무력을 동원하였다. 이 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이 없어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정변은 때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 보이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은 그러한 사정의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지위의 세습됨으로 보아, 연씨일가의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집권 후 그는 종교정책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해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 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 중국세력과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 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 때 발생한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졌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정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켰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면서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 간의 충돌이 빈번했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은 더 격화되었다.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해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 관계가 있다. 그는 대외적인 위기상황은 정권의 안정화와 집권력의 강화를 도모하는 데 오히려 유리하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했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당나라의 압력을 거부하고 사신을 가두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당에 대해 단호한 대결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말갈족과 같은 휘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전쟁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지는 645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군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나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나라와의 관계에서처럼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규정지었던 다원적인 세력 균형상태가 중국대륙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함에 따라 깨어졌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 따라 수 · 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에는 중국의 내부사정과 당나라와 돌궐과의 관계로 때문에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 지방을 선제공격해 수나라와 싸움의 계기가 되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다. 그는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해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했듯이, 당태종이 침공해 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궐 대신 흥성했던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연결해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나아가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의 사마르칸트 지역에 있던 강국(康國)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 때 파견된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사마르칸트시 교외에서 발굴된 아프라시앞 궁전 벽화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인식 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를 수행함에 있어 탄력성을 결여한 경직성을 보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으로부터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들의 주장과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도함에 따라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른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경직된 면모를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안시성 부근 평원에서 고연수(高延壽) · 고혜진(高惠眞)이 이끈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의 세력과 연결해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군과의 정면 회전을 기도했던 것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파생했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젊은 장수를 기용해 한꺼번에 당군을 격파함으로써 새로운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상황에서 강력한 통합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이 되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 속에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 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그의 직을 계승했고 남건(男建) · 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가졌다. 곧이어 터진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