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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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인물
고구려의 제28대(재위: 642년~668년) 왕.
이칭
이칭
고장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682년
관련 사건
고구려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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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보장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2~668년이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다.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나 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 실권을 갖지 못했다. 도교 진흥책도 연개소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초기에는 당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 형제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당했다. 당나라로 잡혀갔다가 요동도독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돌아왔으나 고구려 부흥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유배된 뒤 682년경에 사망했다.

목차
정의
고구려의 제28대(재위: 642년~668년) 왕.
생애 및 활동사항

재위 642∼668. 이름은 장(臧, 藏) 또는 보장(寶臧, 寶藏). 고구려의 왕명은 대부분 시호이나 이 왕은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왕(太陽王)의 아들이다.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비록 왕위에 있었지만 연개소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의 실권을 갖지는 못했다. 재위 기간 중 국내적으로는 천재지변이 잦았고, 643년(보장왕 2)에는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에 요청해 도사(道士)를 초빙하는 등 도교 진흥책을 썼다.

이에 대해 고구려 종교계에서 기득권을 가진 불교 세력의 반발이 심했고, 보덕(寶德)과 같은 승려는 650년에 백제로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당시의 도교 진흥책에 대해서는 도교를 믿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연개소문의 독재 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한편, 재위 기간 중의 국제 관계는, 즉위 초에는 당나라와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해 사절을 교환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 태종의 팽창 정책으로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적대 관계가 계속되어 자주 신라를 공격했고, 나아가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바다 건너 왜와 관계를 재개해 신라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당나라와 밀착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두둔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 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의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 준비 끝에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했고, 자신이 진두 지휘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안시성싸움에서 참패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정면 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해 고구려를 피폐하게 만들기로 하고,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그런데 고구려 침공에 앞장섰던 당 태종이 649년에 죽음으로써 당나라와의 관계는 일시 소강 상태를 맞이했지만, 당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도 고구려 정복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또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654년 거란족을 공격하는가 하면 655년에는 백제와 더불어 신라를 공격하는 등 당나라와 우호 관계에 있던 세력들을 공격해 당나라를 자극했다.

이에 655년 당나라와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고, 660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다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평양성까지 침입해 온 당군을 물리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유민의 부흥 운동이 전개되자 신라와 당나라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해 당나라와의 직접 충돌은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63년 백제 부흥 운동을 이끌어 가던 부여풍(扶餘豐 : 豐璋이라고도 함.)이 고구려로 망명함으로써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데다가,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이듬해에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 형제간에 내분이 일어나 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 내의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 다시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각지에서 분전했지만 패배를 거듭했고, 마침내 668년 9월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당해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은 당나라로 잡혀갔고, 정치의 책임이 왕에게 있지 않다고 해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치열한 반당 운동으로 말미암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신성(新城)으로 옮기고 사실상 한반도 지배를 포기한 이듬해인 677년에는 요동 지방 전체를 지배하는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에 임명되어 당나라에 잡혀간 많은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당나라가 한반도 포기에 따른 요동 지역의 동요를 막기 위해 취한 조처였으나, 요동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해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681년 공주(卭州 : 四川省 卭峽)로 유배되었으며, 682년경 사망하였다.

죽은 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운구되어, 돌궐 가한(可汗)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힐리(頡利)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으며,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남복(男福, 또는 福男) · 임무(任武) · 덕무(德武) · 안승(安勝) 등이 기록에 나타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일본서기(日本書紀)』
「연개소문의 집권과 도교」(이내옥, 『역사학보』 99·100합집, 1983)
「高句麗國遺民反唐分子の處置」(日野開三郞, 『日野開三郞東洋史學論集』 8,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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