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풍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며, 백제 부흥군을 이끈 왕자.
이칭
성명
여풍장(餘豊璋), 여풍(餘豊), 풍장(豊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백제 부흥군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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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부여풍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며, 백제 부흥군을 이끈 왕자이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부여풍은 왜에서 귀국하여 백제 부흥군의 왕이 된다. 그러나 부흥군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고, 백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하자 고구려로 망명한다. 고구려가 패망한 후 당의 포로가 되어 중국 영남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정의
삼국시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며, 백제 부흥군을 이끈 왕자.
가계 및 인적 사항

백제 31대 의자왕의 아들이다. 무왕 때 왜국(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백제가 멸망한 이후 귀국하여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다. 이름은 부여풍(扶餘豊)・풍(豊)・여풍(餘豊) 및 여풍장(餘豊璋)・풍장(豊璋)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다. 일반적으로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풍(豊) 또는 장(璋)으로 본다. 일부에서는 무왕의 아들로 보거나 교기(翹岐)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

주요 활동

『일본서기』 권 23 「서명기(舒明紀)」 3년조(條)에 의하면, 부여풍은 631년 왜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권 25 효덕(孝德) 백치(白雉) 원년(650)조에는 백제군의 지위로 흰 꿩의 상서로움을 말하고 있다. 백치라는 연호를 새로 정할 정도로 풍장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준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복신(福信)도침(道琛)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부여풍은 백제로 귀국하여 부흥군의 왕이 된다. 그의 귀국 시기는 661년 9월설, 662년 정월설, 662년 5월설이 있으나, 대체로 662년 9월설이 받아들여진다. 부여풍이 백제 부흥군의 왕이 된 것은 의자왕을 비롯된 왕자 등 다수가 당에 포로로 잡혀가 왕위를 이을 적임자가 없었다는 점, 왜국에 오랫동안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의 지원을 받기 쉽다는 점, 국내에서의 그의 기반이 미약하였다는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흥운동군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게 된다. 결국 663년 8월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하자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고구려가 668년 패망하였고, 부여풍은 당의 포로가 되어 중국 영남(嶺南)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참고문헌

단행본

金榮官, 『百濟復興運動硏究』(서경문화사, 2005)
노중국, 『백제 부흥운동사』(일조각, 2003)
西本昌弘, 「豊章と翹岐」(『ヒストリマ』 107, 1985)

논문

김주성, 「백제 무왕의 정국운영」(『미륵사의 재조명』,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9)
정재윤, 「미륵사 사리봉안기를 통해 본 무왕‧의자왕 대의 정치적 동향」(『한국사학보』 37, 고려사학회, 2009)
연민수, 「백제의 대왜외교와 왕족」(『百濟硏究』 27,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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