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권 23 「서명기(舒明紀)」 3년조(條)에 의하면, 부여풍은 631년 왜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권 25 효덕(孝德) 백치(白雉) 원년(650)조에는 백제군의 지위로 흰 꿩의 상서로움을 말하고 있다. 백치라는 연호를 새로 정할 정도로 풍장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준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부여풍은 백제로 귀국하여 부흥군의 왕이 된다. 그의 귀국 시기는 661년 9월설, 662년 정월설, 662년 5월설이 있으나, 대체로 662년 9월설이 받아들여진다. 부여풍이 백제 부흥군의 왕이 된 것은 의자왕을 비롯된 왕자 등 다수가 당에 포로로 잡혀가 왕위를 이을 적임자가 없었다는 점, 왜국에 오랫동안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의 지원을 받기 쉽다는 점, 국내에서의 그의 기반이 미약하였다는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흥운동군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게 된다. 결국 663년 8월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하자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고구려가 668년 패망하였고, 부여풍은 당의 포로가 되어 중국 영남(嶺南)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