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진사왕 3년(387) 가을 9월 말갈과 싸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패하였으며, 명칭으로 미루어 관미성과 연관되는 고개이다. 이후 진사왕 8년(392) 관미성에서 고구려와의 전투를 벌였다. 광개토왕 즉위 해(391)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여 일만에 함락시켰다고 한다.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가 1년이 다른 것은 즉위년칭원법과 유년칭원법에 의한 차이로,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관미성의 위치는 전투 장면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다고 묘사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경기도 파주 오두산성, 예성강 중류 남안으로 추정되는 관미령에 축조된 성, 강화 교동도의 화개산성, 강화도 하음산성, 황해도 개풍군 백마산 부근으로 보는 설 등이 있으나, 이 중 오두산성으로 보는 설이 지형 묘사 및 당시 상황과 일치하여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진사왕을 이어 즉위한 아신왕은 재위 2년(393) 가을 8월에 진무에게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관미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 실패하였다. 이처럼 관미령과 관미성은 고구려의 남하로이자 백제 북방의 요충지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이후 백제는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고구려에게 58성 700촌을 빼앗긴 것이 기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