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미성은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지키는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구려는 남하정책을 펴던 가운데 391년(광개토왕 1) 7월에 석현(石峴) 등 10성을 빼앗았고 이어 10월에는 광개토왕이 몸소 군사를 7도(道)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에 대해 방어망에 위협을 느낀 백제도 곧 반격을 시도하여 393년(아신왕 2) 8월에 백제장군 진무(眞武)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관미성의 탈환 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광개토왕비문에 396년(영락 6)에 광개토왕이 정복한 백제 58성 중의 하나로 기록된 각미성(閣彌城)은 관미성과 동일한 성이다.
관미성의 형세를 《삼국사기》에서는 사면이 가파르고 바다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였는 바, 이에 따라 관미성의 위치를 강화군 교동도(橋洞島)에 비정하는 설, 임진강과 한강의 하류인 조강에 위치한 오두산성(鰲頭山城)에 비정하는 설, 또는 예성강 하구에 비정하는 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