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오두산성(烏頭山城)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있는 고대 산성이다.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서해에서 한강 혹은 임진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여 일찍부터 군사·지리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왔다. 오두산 정상(해발 109.1m)을 감싸고 있는 오두산성은 해발 80∼90m 사이에 있으며 두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정상부를 감싼 내성과 계곡부의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성의 동벽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되었다.
파주 오두산성이 위치한 산의 명칭은 오도산(烏島山)에서 오두산(烏頭山, 일명 구도산(鳩島山)), 오두산(鰲頭山) 등으로 바뀌어 왔다. 산의 모습이 까마귀, 비둘기, 자라의 머리 모양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이와 같은 산의 명칭 변화 때문에 산성의 명칭도 오도성(烏島城), 오도성산성(烏島城山城), 오도산성(烏島山城), 오두산성(鰲頭山城), 오두산성(烏頭山城) 등으로 변화하였다.
오두산 정상(해발 109.1m)을 감싸고 있는 오두산성은 해발 80∼90m 사이에 있으며 두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정상부를 감싼 내성과 계곡부의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성의 규모는 내성 둘레 1281.2m, 외성 둘레 610.1m 정도이며, 내부 면적은 약 74,430㎡ 정도이다.
오두산은 현재 군사 지역으로 한강 수변 지역에 경계 철책이 설치되어 있고, 서쪽과 북쪽에 군사 시설이 위치해 산성의 현황 파악이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산 정상부에 1992년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건립되면서 진입 도로가 개설되고, 군사용 도로까지 만들어져 훼손이 심한 상태다.
오두산성은 1991년과 2006년 외성의 동벽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41m 정도의 석축성이 정연히 드러나 현재 이 구간은 잘 정비 · 복원되어 있다. 성벽은 암반을 평평하게 고르고 그 위에다가 석축을 하였는데, 암반층 위에 장대석을 기단으로 삼고 잘 다듬은 가늘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석재로 1∼2cm 정도 들여쌓기를 하면서 바른층쌓기로 축성하였다. 이러한 축성법이 어느 시기에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없다.
2022년의 발굴 조사는 외성 동벽이 있는, 구릉 너머에 있는 내성의 동벽 구간 일부에 대해 이루어졌다. 이 구간은 자연암반층을 ‘ㄴ’자 형태로 굴착한 후 축성하였는데 체성부는 거의 유실되고 기저부 1∼2단만 남아 있다. 이 석축 구간은 기단 내에 일정한 간격(기둥 사이의 거리 2m~3.5m)으로 나무 기둥[영정주(永定柱)]을 세우기 위해 놓은 초석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8세기를 중심 연대로 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기와가 다수 확인됐다. 이러한 축성 기법은 고려시대 축성된 강화 중성과 청주 우암산성 등에서 조사되어 고려시대의 특징적인 축성법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오두산성에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러한 축성법이 적용된 산성이 축성된 것으로 파악되어 앞으로 그 기원 문제가 숙제로 남게 되었다.
외성의 동벽은 큼직한 돌을 기저부로 삼고 들여쌓기를 하면서 잘 가공한 가늘고 긴 성돌로 바른층쌓기를 하여 삼국시대의 축성법에서는 볼 수 없는 성곽 축조 기법으로 축조하였다. 이러한 축성법은 6세기 후반에 축성하였던 남원 교룡산성, 722년에 축성한 경주 관문성, 845년에 축성한 순천 봉화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의 축성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오두산성에서 조사된 외성의 동벽과 내성의 동벽 구간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오두산성에서 출토되고 있는 고식기와와 백제토기 등으로 볼 때 오두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중요 요충지로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고식기와 가운데 회청색경질기와는 선문, 격자문 등이 시문되어 있으면서 기와분할면의 와도흔이 전면 1회, 전면 2회, 전면 3회 등에 걸쳐 있어 백제시대의 평기와 분할 기법과 같은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다른 계통의 고식기와는 약간 붉은색의 연질계 기와로 등에 선문과 격자문이 시문되고 측면 분할은 전면 1회, 전면 2회 등의 와도흔이 보여 전자의 기와와 다른 양상이다. 이러한 기와들이 고구려 계통일 가능성이 있다.
이 산성은 그동안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백제의 북변에 위치하였던 관미성(關彌城)으로 비정된 견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백제의 관미성이라 기록하여 학계의 관심을 모은 곳이다. 그렇다면 백제 축성법이 적용된 체성부가 발견되어야 할 것인데 아직 발굴 조사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오두산성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은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있다. 따라서 이 산성은 백제 시기부터 조선시대까지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진 산성으로 파악된다. 다행히 내성 동벽 구간에서 많은 양의 오래된 식기와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오두산성이 백제 시기에 초축되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