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성 ()

건축
유적
문화재
남북국시대에 축조된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과 울산광역시 북구 천곡동 일대에 있는 석축 성곽.
이칭
이칭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 만리성(萬里城)
유적
건립 시기
남북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높이
3m
둘레
장성 12.6㎞, 신대리산성 1.8㎞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울산광역시 북구 천곡동 일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울산광역시 북구 천곡동 일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관문성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과 울산광역시 북구 천곡동 일대에 위치한 장성과 동쪽에 퇴뫼식으로 쌓은 석축 산성인 신대리산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산성 북쪽으로 봉수대까지 확인되는 복합 관방 시설이다. 관문성은 신라 722년(성덕왕 21)에 축조한 모벌군성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장성 구간은 높이 3m의 석축 면석으로 확인되는데, 이보다 앞서 축조된 남산신성이나 명활산성과 축조 방식의 비교 자료가 되어 남북국시대 신라의 축성 기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정의
남북국시대에 축조된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과 울산광역시 북구 천곡동 일대에 있는 석축 성곽.
형태와 특징

관문성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석계리, 문산리, 녹동리, 양남면 신대리에 위치하며, 외동읍의 서편에 위치한 치술령 줄기를 따라서 울산광역시 북구 천곡동, 중산동, 울주군 두산리에 걸쳐 있다. 관문성은 일반적인 산성과는 다르게 동서 축으로 길게 배치된 둘레 12.6㎞의 장성이 중심이다. 그리고 동쪽 산봉우리에 퇴뫼식 산성으로 쌓은 둘레 약 1.8㎞의 석축 산성인 신대리산성, 산성 북쪽으로 봉수대까지 확인된다. 장성-산성-봉수가 결합된 관방 시설로 파악되어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는데, 각각의 시설이 다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신라가 673년(문무왕 13)에 북형산성을 축조하여 왜적의 침입을 방지하였으며, 722년(성덕왕 21)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삼국유사』 기이2 효소 왕조에서는, '개원 10년 임술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을 쌓았고, 지금의 모화촌으로 경주의 동남쪽에 속하니, 곧 일본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792보 5자이고, 축성에 동원된 인력이 39,262명이고 감독관은 원진 각간(元眞 角干)'이라는 자세한 내용이 확인된다. 이후 김헌창의 난이 발생하였을 때 신라 왕경(王京)의 남동쪽을 방어하는 기능도 수행한 바 있다. 즉, 관문성은 모벌군성으로도 불리며 북형산성과 함께 왕경을 방어하는 중요한 관방 시설로 722년에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 조에서 석성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고 사람들이 관문성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확인되므로, 조선 전기에 관문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에서는 관문성을 사람들이 지금은 만리성(萬里城)이라고 한다는 내용도 보인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해동지도』 등 여러 고지도에서 관문성을 만리성의 터라고 기록한 내용이 확인된다. 즉, 기록을 통하여 신라에 의해 축조된 관문성이 조선 전기에는 이미 폐성이 된 상태이지만, 흔적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중에는 산성의 인근에 위치한 신흥사의 승병과 의병들이 관문성에서 항전하기도 하였으며, 1871년에 수축하여 신흥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둘레가 12㎞에 이르는 장성은 대부분의 구간이 붕괴되었고 토사로 덮여 토성처럼 보이는 구간도 있지만, 높이 3m 정도의 석축 면석이 잔존한 구간도 확인된다. 장성 구간에 모화리와 녹동리 구간에 문지(門地)가 있었지만 국도 개설로 훼손되었다. 특히 모화리 문지의 내측에는 기와가 대량으로 확인되어 문지에 문루가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관문성의 장성 구간은 산지와 능선 부분은 편축식, 평지와 곡부에는 협축식으로 축조하였다.

관문성의 평지 구간은 2019년에 발굴 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이 구간의 외벽은 생토를 퍼서 기저부를 조성하고 상부에 지대석을 설치하였다. 지대석과 굴광선 사이는 성토하였고, 상부에 방형과 장방형의 면석을 품자형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하였다. 외벽은 면석이 13단인데, 추정 높이는 3.1m이다. 내벽의 경우에도 지대석을 포함하여 17단의 면석에 높이는 3m인데, 내외벽의 실제 높이는 5m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된다. 내벽도 생토를 굴착하여 기저부를 조성한 뒤에 지대석을 올리고 면석을 붙였다. 내벽 면석은 외벽에 비해 거칠게 치석하였지만 바른 층 쌓기를 하였고, 내벽은 할석을 포함하여 외부를 성토하여 하천의 범람 등에 대비한 구조이다. 내벽과 외벽 사이의 적심부(積心部)는 면석과 직교하도록 할석을 종방향으로 서로 맞물리게 채우고, 나머지 구간에는 작은 할석으로 공간을 채워 성벽의 안전성을 높인 것이 확인되었다.

신대리산성의 특징

관문성 장성의 동쪽에 위치한 속칭 성말랭이(해발 590m)에 퇴뫼식으로 축조된 산성이 있는데 신대리성 또는 기박산성, 관문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신대리산성의 둘레는 약 1.8㎞이고 석축이다. 성벽의 몸체 부분은 장방형 또는 방형의 치석된 면석을 품자형 쌓기 하였다. 성벽의 상부에는 끝부분을 치석하지 않은 할석으로 보축한 흔적이 확인되는데, 고려시대 이후에 수리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성벽에 축성 당시의 공사 기록을 새겨 놓은 각자성석(刻字城石)이 확인되었다. 각자성석에는 축성을 담당한 군현별로 북쪽과 남쪽 경계를 표시하고 담당한 구역의 길이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확인된 각자성석의 내용을 통하여 각 지역은 약 6보 3척(11.7m)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150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축성이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대리산성의 축성이나 운영과 관련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대리산성의 축성 기법이 장성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초축 시기의 차이가 크지 않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반면에 신대리산성이 산성으로 7세기 후반에 먼저 축조되고, 722년에 장성이 축조된 것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

신대리산성의 성벽에는 동 · 서 · 남 · 북의 4개 문지가 있는데 현재 남문지는 초축된 남문지의 동쪽으로 약 150m 이격되어 있으며, 높이 1m, 폭 2m에 조잡한 할석으로 축조되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성문으로 보인다.

성벽에는 총 3개소의 수구(水口)가 확인되었다. 현재 남문지 동북쪽 350m에 위치한 수구의 입수구는 성벽이 붕괴되어 확인되지 않지만, 출수구는 정사각형 모양이다. 이 수구에서 120m 북쪽에 2개소의 수구가 존재한다.

성 내부에는 다양한 시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표 조사를 통하여 4개소에 건물지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건물지에서는 신라 말~고려 초의 기와들도 다수 수습되었다. 또한 남문지 내측에 직경 3.2m의 추정 연지가 위치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관문성은 신라 왕경의 남쪽 부분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된 복합 관방 시설이다. 관문성의 장성과 신대리산성은 둘 사이의 관계 및 축조 시기 등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관문성은 왕경의 성장 그리고 관방 체계의 구축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먼저 축조된 남산신성이나 명활산성과 축조 방식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라의 축성 기술의 발전과 변화를 살피고 남북국시대 신라 축성 기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단행본

『유리건판으로 보는 신라의 성곽』(국립중앙박물관, 2015)
『관문성 기초학술조사보고서』(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6)
『관문성 종합정비계획 수립 보고서』(울산발전연구원, 2018)
『관문성(천곡동 1-1구간) -울산 관문성 훼손구간 긴급발굴조사 보고서-』(울산연구원 문화재센터, 2021)

논문

박방룡, 「신라관문성의 명문석 고찰」(『미술자료』 31, 국립중앙박물관, 1982)
정영호, 「신라 관문성에 대한 소고」(『고문화』 15,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77)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윤성호(한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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