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장암진성(舒川 長巖鎭城)은 충청남도 서천 서남단의 후망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나온 궁계산 끝자락에 있다. 둘레 약 660m의 이 성은 구릉과 평지를 역사다리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석축식 평산성(平山城)이다. 남벽과 북벽에는 각각 남문과 북문이 있다. 동벽에서 5~7m 벌어진 지점에는 폭 4m, 깊이 1.2m의 해자가 있다. 서벽은 벽체가 바다에 접하고 있어 바다를 천연적인 해자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관리 성충이 기벌포(伎伐浦) 방어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 주석에는 기벌포를 장암(長巖) · 손량(孫梁) · 지화포(只火浦) · 백강(白江)으로 적고 있다. 기벌포와 관련한 서술에 장암이 언급된 것은 지정학적으로 이 지역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백제가 장암 지역에 관방 시설을 구축하였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서천 장암진성이 초축된 시기는 『중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종실록』에는 1511년(중종 6) 서천포에 성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서천군 관방조에 고려시대의 장암진(長巖鎭)에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이 배치된 서천포영(舒川浦營)을 설치하였는데, 중종 9년(1514)에 둘레 1,311척(약 397m), 높이 9척(약 2.7m)의 규모로 석축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서천포성이 바로 서천 장암진성이다. 따라서 서천 장암진성은 1511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514년에 완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에서는 서천 장암진성의 둘레를 1,392척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의 규모가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 크게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남문과 북문 옹성(甕城)의 길이를 포함한 결과로 추정된다. 또한 『해동지도』에는 서천 장암진성에 민호(民戶) 168호, 주사속오군 229명, 군량미 200석 3두, 군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1척이 소속되어 있다고 주기되어 있다.
한편 『호서읍지』 장암진 지도에서는 성 내부에 동헌 겸 객사, 내아(內衙), 창고, 군기고, 사령청(司令廳), 삼문(三門) 등의 주요 건물이 있었고, 성의 서남부 지역에 다수의 민가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천 장암진성의 남벽과 서벽 일부가 군장공단 산업도로 개설 구간에 포함되어 1997년에 남문지 및 남벽에 대한 발굴 조사(發掘調査)가 진행되었다. 이때 이미 파괴된 남벽에 대한 단면 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구간별로 축성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평지에 위치한 성벽의 기초부는 풍화암반토를 ‘L’자형으로 굴착한 뒤 마사토와 점토를 채운 후 기초석을 쌓은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산지에 세워진 성벽은 풍화암반토를 수평으로 자른 후 갈색의 사질점토(沙質粘土)를 깔고 성벽을 올린 것을 확인하였다. 성토부(盛土部)에서는 고려시대 도기편과 조선시대 백자편이 수습되었다.
남문지에서는 초석과 문루(門樓)의 기초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홍예기석(虹霓基石)을 올리기 위한 초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남문의 전면부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후면부는 평거식(平据式) 형태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토층으로 보아 남문지는 3차례 정도 수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9년에는 서천 장항제련소 주변의 토양정화사업과 관련하여 장암진성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조사한 구간은 성 내부, 북문지에서 북동쪽 곡간부, 남동벽 회절 구간이다. 성 내부에서는 서벽과 함께 북문지, 건물지(建物址) 5동, 지상 건물지 1기, 석열유구 4기, 소성유구(燒成遺構) 1기, 우물 3기, 기타 수혈 50기 등이 확인되었다. 북문지에서 북동쪽 곡간부에서는 제철유구(製鐵遺構) 2기, 수혈유구(竪穴遺構) 8기 등이 확인되었으며, 남동벽 회절 구간에서는 수혈유구 1기 등이 조사되었다.
서천 장암진성의 북문지는 후대에 어지럽혀진 상태이다. 북문지 옹성(甕城)의 내벽은 점토, 석재, 기와를 섞은 기반다짐층 위에 소형 지대석을 놓아 면석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옹성의 외벽은 점토만 다진 후 대형 지대석을 놓은 뒤 면석을 올렸다. 북벽 체성(体城)부의 경우, 외벽은 기반암까지 굴착하여 다짐층을 조성한 뒤 지대석을 놓고 면석을 올리거나, 기반암 위에 잡석 지정(雜石地定)을 하고 면석을 바로 올리기도 하였다. 내벽은 여러 층의 뒤채움돌을 쌓고 수평 또는 사선으로 뒤채움토를 채워 판축한 양상이 확인된다. 뒤채움토 중간에서 내부 석축 시설도 확인되었다.
서벽은 전체 범위는 알 수 있으나, 체성부의 상부가 유실되어 지대석과 뒤채움돌만 확인할 수 있었다. 서벽은 북벽에 비해 비교적 큰 지대석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서벽은 해수가 유입되는 지점이라 말뚝 지정, 잡석 지정을 통해 지반을 강화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서천 장암진성의 성벽은 대체로 대지 조성, 기저부 굴착, 말뚝 혹은 잡석 지정, 지대석 조성, 면석 축조시 뒷채움석 설치, 뒷채움토 성토의 과정으로 축조되었다.
장암진성 내부에서는 다수의 건물지 유구가 확인되었다. 성벽에서는 고려시대 도기가 수습되었으나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16세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사료의 내용과 성의 초축 시기는 대체로 일치하지만, 고려시대에 서천 장암진성을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성 내부에서는 건물지가 소실된 후에 대지를 다시 조성하여 17~18세기도 성을 운영한 양상이 보인다.
서천 장암진성의 축성법은 조선시대 초기 읍성의 축성법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인근에 있는 서천과 서해안 지역의 읍성에 비해 기반의 조성이나 면석의 치석이 간략화된 특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서천 장암진성은 축성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