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2 일대에 있는 포곡식 석축 산성으로 둘레는 약 9㎞이고 남은 성벽의 높이는 2m이다. 신라 진평왕 대에 초축되었다는 설과 문무왕 대에 축성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의 서창지와 비슷한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신라시대에 초축된 경주 부산성은 왕경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경주와 영천, 포항 지역을 관할하는 군창의 역할을 담당한 중요한 관방시설이었다.
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은 건천읍 서쪽에 있는 부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3개의 곡부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경주 부산성의 외곽은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를 하기 유리하며, 성 내부에는 평탄한 지형이 많아 관련 시설을 설치하기에 유리하다.
경주 부산성이 초축된 시기와 관련하여서는 서로 충돌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에서는 문무왕 3년 1월에 경주 부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 법민조에도 문무왕 대에 경주 부산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축조를 마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는 진평왕 때에 화랑 죽지랑의 낭도가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근무하였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이에 따라 경주 부산성은 진평왕 대에 처음 축조되었고, 문무왕 3년(663)에 개축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성곽조에는 '부산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3,600척, 높이가 7척인데, 절반 정도가 붕괴된 상태이며, 성 내부에 개천 3개소, 연못 1개소, 우물 9개소와 군창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대동지지』 경주부 성지조에는 '문무왕 3년에 성을 석축하였고, 둘레가 3,600척이며, 연못 1개소, 우물 9개소가 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반면에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건복 신해년(진평왕 13년, 591)에 부산성을 쌓았고 둘레가 16,593척이다'라고 전한다. 이와 같이 경주 부산성의 축성 시기와 규모에 대한 기록은 사료마다 다른데, 이것은 경주 부산성이 조선 숙종 대의 대대적인 산성 정비 사업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단순한 기록상의 오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초축 시기와 관련하여, '591년에 부산성이 초축되었다'라는 『경상도속찬지리지』의 기록은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와 연관된 설명으로 보인다. 이 기록을 근거로 진평왕 대에 부산성이 초축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여왕 지기삼사조에 '부산 아래 여근곡에 백제의 병사가 침입했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진평왕 대에는 부산성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어 진평왕 대에 부산성이 초축되었다는 설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경주 부산성은 아직 발굴 조사(發掘調査)가 진행되지 않았다. 다만 지표조사와 실측 조사를 통하여 부산성의 둘레가 9,470m이며, 지형에 따라 축조 방식이 다르나 대체로 협축식으로 축조된 산성임을 확인하였다.
경주 부산성 남동쪽 지점에는 치성(雉城)처럼 돌출된 성벽이 존재하고, 성 내부에는 복두암이 있다. 이로 인해 부산성이 내외성 2중 구조로 된 산성인지, 아니면 고려시대에 방어를 위해 이 시설을 부가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경주 부산성의 대부분 구간은 붕괴된 상태이다. 그렇지만 상태가 양호한 20m 정도의 구간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최대 높이 약 2m의 성벽이 확인된다. 체성(体城)부는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 계통의 할석(割石)으로 면석(面石)을 쌓고 중간에 잡석을 채우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해당 구간의 성벽은 고려시대 이후에 축조되었거나 수리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 부산성에는 동 · 서 · 남 · 북 총 4개소의 문지가 확인되었지만, 남문지를 제외하면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동문지와 남문지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문지에는 반원형의 옹성(甕城)이 설치된 것으로 파악된다. 남문지 주변에서는 다량의 와편이 수습되고 있어 남문은 문루를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암문지 1개소, 치(雉) 2개소도 파악되었다.
지표 조사를 통해서 6개소의 건물군이 확인되었는데, 이 건물지들은 장대지(將臺地) 혹은 창고와 관련된 유구인 것으로 파악된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다. 이 중에서 창터골이라고 불리는 산성마을 동편에서 초석을 갖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지는 상하단으로 구분되는 구간에 초석이 있어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단부의 건물지는 정면 11칸, 측면 5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 서창지와 유사한 규모이다. 경주 부산성에 창고가 있었다는 것은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 언급된 부산성 창직의 존재와 연결된다. 한편 성 내부의 수량은 풍부하며, 4개소의 우물이 확인되었다.
산성 내에서는 신라시대뿐 아니라 고려~조선시대의 유적도 확인된다. 또한 9㎞가 넘는 대형 산성이라는 점, 성벽에서 후대에 개축된 구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고대 산성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옹성을 갖춘 남문지 등은 경주 부산성이 고려 이후에 만들어진 중세 산성의 성격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경주 부산성은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경주와 영천, 포항 지역의 군량미를 비축하는 중요한 방어용 산성이었다는 점에서 경주 부산성은 경주 지역의 관방 체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