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현산성(馬峴山城)은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봉림리와 밀양시 삼랑진읍의 경계에 있는 무척산 가지 능선의 독뫼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성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되었으며, 둘레는 약 300m이다. 마현산성은 소규모의 산성이지만 밀양-삼랑진-김해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고 북쪽으로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전기 이전까지 마현산성과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대동지지』에서 마현산성과 관련된 내용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여기에서는 마현성을 과녀산성(寡女山城)이라 하고, 둘레 1,030척, 우물 1개소가 있는 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과녀산성이 아니라 마현산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대동지지』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규모의 산성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서술할 당시 마현산성은 폐성된 상태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여지도서』에서도 마현산성이 폐성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마현산성의 둘레가 1,035척으로 기록되어 있어 다른 문헌의 기록들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조사 결과 마현산성의 동벽은 자연 절벽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축성된 것임을 확인하였다. 서문지-동문지와 북문지-동벽 사이에는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서벽 일대는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성벽이나 성 내부의 시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 2010~2011년에 북문지와 서문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마현산성의 북문지에서 허튼층쌓기로 조잡하게 만든 옹성(甕城)이 확인되었다. 한편 서문지에는 계단식 출입 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서문지 안쪽에 확석(確石)과 초석(礎石)이 좌우로 배치된 사실이 확인되어 서문에는 문루(門樓)가 설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서문지 개구부(開口部) 하단에서는 모서리를 치석(治石)한 면석을 품(品)자 형태로 쌓고 빈 공간에 작은 할석(割石)을 끼운 석축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면석은 문지 남동쪽에 있는 체성(体城)의 외벽에도 남아 있다. 이러한 축성 방식으로 보아 마현산성은 삼국시대에 운영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산성의 내외벽부에서는 인화문(印花文)이 출현하기 이전 등장한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과 원점문(圓點文)이 새겨진 뚜껑, 부가구연대부장경호(附加口緣臺附長頸壺)와 완편(宛片) 등이 수습되었다. 출토된 토기와 완편을 통해서 6세기 중반 경 신라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마현산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문지와 성벽은 가공되지 않은 할석을 사용해 허튼층쌓기로 면석을 축조하였으며, 수축(修築)이 이루어진 구간도 확인되었다. 앞서 신라시대 토기가 수습되었으나, 성 전체에서 출토된 자기의 경우에는 청자와 분청사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이후에 마현산성이 개축되었으며, 조선 중기까지 산성을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현산성은 신라가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초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이르러서는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 피난성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마현산성과 관련된 기록이 조선 전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보이지 않다가 『여지도서』에서는 폐성된 상태라고 기술된 것으로 보아, 마현산성은 임진왜란 당시에 산성을 일시적으로 사용했다가 이후 폐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향후 조사를 통하여 밝힐 필요가 있다.
마현산성은 밀양에서 삼랑진, 그리고 김해로 연결되는 교통의 결절지(結節地)에 위치한다. 이러한 마현산성의 지리적 입지는 6세기 신라의 남진과 나말여초, 여말선초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방어와 관련된다. 현재 마현산성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자료만 확보된 상태이다. 그러나 마현산성은 향후 조사를 통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낙동강을 둘러싼 관방(關防) 체계와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