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산성은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산40-2번지 일대에 위치한 고려시대에 초축된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영원산성은 치악산(해발 1,288m)의 주 능선에서 금대 야영장 방향으로 뻗은 능선의 정상부(해발 970m)에서 서남쪽으로 향하는 계곡을 감싸고 있다. 영원산성의 북쪽에는 금두산성, 남서쪽에는 해미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영원산성이 위치한 치악산은 동서축으로 원주에서 영월, 남북축으로 원주에서 제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고려사』 열전 원충갑전에서 고려 충렬왕 17년(1291)에 합단(哈丹)이 침입하였을 때 영원산성에서 싸운 기록은 확인되지만 정확한 초축 시기를 밝힌 문헌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영원산성을 영원산석성(靈原山石城)으로 다르게 표기하였지만, 둘레가 646보이며, 샘이 2개 있고 창고가 9칸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원산성이 고적조에 기록되어 있어 16세기 전반에 폐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선조실록』에서는 선조 26년(1592)에 원주감사 김제갑이 영원산성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인 기록을 통하여 임진왜란 당시에 다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인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는 영원산성이 석축이고 둘레가 3,749척이고 성 내부에 우물이 1개소, 샘이 5개소가 있는데 지금은 폐성이 되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 성 내부에 산성사(山城寺)를 설치하고 승장(僧將)을 임명하여 산성을 수호하도록 하였는데, 영조 때 성은 무너지고 사찰은 폐지되었다는 내용도 전한다. 이러한 승병의 주둔 사실은 1647년에 간행된 이명한의 『백주집(白州集)』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대동지지』에서 영원산성은 신라 신문왕 때 쌓았고, 고려시대에 개축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재개축하였고, 둘레가 1,031보라는 기록이 있다. 김정호는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축조한 둘레 1,031보의 북원경성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험준한 산지에 위치한 입지나 축성 내용 등을 통하여 신문왕 대에 축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19992002년에 영원산성의 남벽 410m가 복원되었고, 200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132015년까지 3차례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산성은 둘레가 약 2,400m이며, 성벽은 할석을 이용하여 구간별로 내외협축 혹은 내탁식으로 수직에 가깝게 축조하였다. 성벽 상단에는 작은 할석으로 평여장을 쌓은 구간도 확인되며, 성 내부에는 등성 시설을 설치한 구간도 있다. 성벽은 붕괴된 구간에서는 12m가 남아 있고, 폭은 23.5m이다. 잔존 상태가 좋은 구간에서는 성벽의 높이가 3m에 이르는 곳이 있다.
영원산성에서는 2개소의 용도가 존재한다. 동벽과 북벽의 회절부에는 둘레 100m의 용도가 능선을 따라 구축되어 있다. 북문의 동쪽에는 길이 17m의 용도가 옹문과 같이 설치되어 있다. 북문지 용도의 높이는 2.7m, 폭은 1.5m로 20~22단 정도의 석축이 잘 남아 있다. 영원산성에는 남문과 북문이 있으며, 서문지로 추정되는 지점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 내부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을 배수하기 위한 수구문도 확인된다. 성 내부에는 곳곳에 건물지가 흩어져 있으며 숯 가마터도 확인되었다.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기록에 의하면 우물과 샘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013년에 영원산성의 1차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남문지와 내측에 수혈 1기를 조사하였다. 2014년 2차 조사에서는 북문지와 북문지 내측의 건물지 1기, 수혈 3기, 구들 유구 2기, 야외 노지 3기 등을 확인하였다. 2015년의 3차 조사에서는 북문지 북쪽의 용도와 내측의 건물지와 석축 유구 등에 대하여 조사가 진행되었다.
3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하여 남문지는 초축 후 3차례에 걸쳐 수축이 진행되었으며, 성벽도 동일한 수리가 진행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북문지의 경우 주변 북벽에서 1차례의 수축 흔적을 확인하였다. 출토된 유물은 13세기를 전후한 청자편과 고려 후기의 기와편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전기의 유물은 극소량이 확인되지만 17~18세기를 전후한 기와와 백자도 다량 수습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영원산성은 문헌의 기록과 같이 대몽항쟁기에 입보용 산성으로 처음 축조되었고, 임진왜란에 재활용되면서 수축이 이루어지고, 18세기까지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원산성은 고려시대에 초축되었고, 대몽항쟁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이행되는 축성 기법의 변화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험한 땅에 건립된 입보용 산성으로서의 성격과 축조 방식의 변화 등을 통해서 중세의 군사 운영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를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