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족산성(鷄足山城)은 대전 대덕구 장동 산84번지 일대에 위치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둘레는 1,037m이며 구간별로 협축 또는 편축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북벽이 940cm로 가장 높다. 성벽의 축조 방식이나 현문식 문지는 신라의 축성 방식과 상통하지만, 서문지의 백제 기와나 집수지에서 출토된 백제 사비기 토기의 해석에 따라서 백제 초축설과 신라 초축설로 견해가 나누어진다. 대전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산성은 6~7세기 대에 삼국의 접경인 금강 유역을 두고 벌어진 쟁탈전의 상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계족산성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84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계족산(해발 423m)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약 1.3㎞ 지점에 해당되는 봉우리(해발 431m)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산성은 남북을 장축으로하는 장방형의 산성으로 둘레는 1,037m이다. 성벽은 능선을 따라 구간별로 편축 혹은 협축을 하였는데, 계곡을 감싸는 동벽은 협축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계족산이라는 지명은 확인되지만, 계족산성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여기서 계족산성은 사면이 매우 험하며, 둘레가 374보 2척이고, 성 내에 샘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회덕현 고적조에는 계족산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1,969척이고, 높이는 16척이며, 성내에 우물이 하나가 있는데 폐성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조선 전기에 계족산성은 이미 폐성되어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계족산성은 1992년 지표 조사를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최초 조사에서 계족산성의 성벽 1,037m 중에서 350m가 잘 남아 있는 상태임이 보고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동벽이 46m, 남벽은 28.1m, 서벽은 7.8m, 북벽은 9.4m이다. 체성은 편암을 납작하게 떼어 낸 면석으로 정연하게 축조하였다. 북벽과 서벽의 경우 구릉 사면부를 ‘L’자형으로 굴착하여 기저부를 조성하고 별도의 시설 없이 면석을 축조하였다. 협축 구간은 내외벽을 동시에 축조하면서 내부에 깬돌로 뒤채움을 하면서 올린 것이 확인된다. 내외벽은 초축 성벽 상단에 정형성이 떨어지게 축조된 면석이 확인되어 1차례 이상 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벽을 축조한 뒤 체성을 보강하기 위해 단면 부체형으로 기단 보축하고, 한 차례 고쳐 지은 흔적이 확인된다.
동 · 서 · 남문 3개소가 존재하는데, 동문과 서문은 현문식이다. 성 내에는 다수의 건물지와 2개소의 우물지가 존재하는 것이 파악되었다. 1993년 서문지 조사에서 백제 사비기 연화문 와당 2점이 수습된 바 있다. 1999년 조사에서는 남문지에서 3차례 수개축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6세기 중엽에 초축되었고, 7세기 중엽에 개축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나말여초에 문지를 축소하는 개축이 진행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199798년 1차 발굴 조사에서는 9개소의 삼국시대고려시대 건물군의 범위를 확인하였다. 1, 2건물지의 경우 8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까지 운영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2018년에 조사된 8호 건물지는 초석을 기준으로 정면 14칸, 측면 2칸에 길이 27.5m, 폭 9m의 규모이다. 이러한 규모와 구들이 없는 내부 시설 등을 통하여 거주용 건물이 아닌 군창 역할을 하던 건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9~10세기 대가 중심인데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지만, 하층에 선대의 건물 유구와 주변에 관련 시설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에는 집수지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집수지는 호안 석축의 축조 방식에 따라서 판석으로 벽면을 조성한 1차 집수지와 각석재를 사용한 2차 집수지로 구분된다.
1차 집수지도 집수지의 형태에 따라서 1-1차 집수지와 1-2차 집수지로 구분된다. 1-1차 집수지는 남북으로 폭이 25m이고 동서폭은 5.2m인데, 북쪽이 곡면을 이루는 궁륭형의 모습이다. 내부에는 침목을 가구한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1-2차 집수지는 남벽과 북벽을 기존 벽면 안쪽으로 들여서 쌓아 직사각형의 계단식 구조로 개축되었는데, 두 시설의 시기 차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1차 집수지 상단에 퇴적이 심하게 이루어지자 2차 집수지를 조성하였다. 1-1차 집수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한 초축 시기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동벽 내측과 집수지 동벽 사이의 내부 성토층에서 6세기 중반의 단각고배가 출토된 것에 주목된다. 이 성토층은 집수지 축조 이전의 토층이므로 계족산성을 처음 축조한 주체는 신라로 파악할 수 있다. 1-2차 집수지에서는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의 사비기 백제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서문지에서 백제토기와 와당이 출토된 것과 연결하여 계족산성을 백제가 초축하였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2차 집수지는 출토 유물을 통해서 7세기 후반경에 개축되어 9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을 통하여 계족산성을 초축한 주체가 백제인지 신라인지를 떠나서 7세기 경에 백제가 계족산성에 주둔하여 흔적을 남긴 것은 명확하다. 이러한 점에서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인 계족산성의 점유 세력이 유동적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전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있고 중요한 산성인 계족산성은 6~7세기 대에 삼국의 접경인 금강 유역을 두고 벌어진 쟁탈전의 상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