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읍성 ()

건축
유적
문화재
경주시 동부동, 북부동 일원에 위치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평지 읍성.
유적
건립 시기
고려시대~조선시대
관련 국가
고려, 조선
둘레
2,412m
소재지
경상북도 동부동, 북부동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동부동, 북부동
내용 요약

경주읍성은 신라 왕경의 북쪽에 해당하는 경주시 동부동과 북부동 일대에 위치하는 둘레 2,412m의 석축 평지성이다. 고려시대에 초축되고 조선시대에 개축되어 사용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 발굴 조사를 통하여 경주읍성의 현황 자료가 확보됨과 동시에 연차적으로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경주읍성은 신라의 왕경에 위치하면서 이후 고려시대의 동경, 조선시대의 경주부의 중심지로 중세 경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의
경주시 동부동, 북부동 일원에 위치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평지 읍성.
건립 경위

경주읍성의 정확한 초축 시기를 언급한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 병지 성보 조에서 1012년(고려 현종 3)에 경주, 장주, 금양, 궁올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참고하여 이 시기에 읍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경통지』 권6 성지 조에는 “읍성의 시축 연대는 불명이지만, 고려 우왕(무오년, 1378)에 개축하였고 둘레가 4,075척, 높이가 12척 7촌으로 석축이다. 남문은 징례문이고, 동문은 향일문이고, 서문은 망미문이고, 북문은 공신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378년(고려 우왕 4)에 경주읍성이 개축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 세종 대(1418~1450)에는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읍성의 개축이 진행되었다. 이때 읍성의 입지와 축조를 위한 표준화가 시도되며, 기존의 토성을 석축화하거나 해당 지역의 주2 수에 따라 읍성의 규모를 조정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경주읍성이 다시 개축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경주읍성도 동일한 기준에 따라 수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종실록』에는 1451년(문종 1)에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도체찰사 정분이 3도의 읍성을 심정한 후, 계를 올린 내용에서 "경주부 읍성은 옛 모습처럼 둘레 4,075척, 높이 11척 6촌이고, 주14의 높이 1척 4촌, 주15 26개소, 문 3개소, 옹성은 없으며 여장이 1,155첩, 우물 83개소, 해자는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여기서 조선 전기 경주읍성의 규모와 외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문종실록』에 실린 1451년(문종 1) 9월의 기록에 해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세조실록』에서는 해자의 존재가 확인된다. 1467년(세조 12) 정월에 경주 북천의 물길이 읍성을 향하여 곧바로 향해 있다는 점에서 읍성 하단의 해자가 모두 메워지고 막혀서, 제방과 해자를 수축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1451~1467년 사이 어느 시점에 경주읍성에 해자가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경주읍성이 파손되었다.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 성곽 조에는 “징례문은 읍성의 남문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숭정 임신년에 부윤 전식이 중수하였으며, 나머지 동 · 서 · 북쪽에 위치한 삼문을 차례로 보수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임진왜란 당시에 경주읍성의 중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전국적인 성곽 주3가 다시 진행된다. 『부선생안』의 기록을 통해 1744년(영조 20) 10월에 경주부윤 정홍제가 경주 부성을 개축하였고, 이 시기에 남문의 누각도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54년(영조 30)에는 경주부윤 홍익삼주16와 일승정 · 함벽정을 신축하고, 세금당 · 금학헌 · 이요당을 중수하였다. 1755년(영조 31)에는 경주부윤 이수득이 남문루를 중건하였다.

이후의 1933년에 간행된 『동경통지』 역대 수관 편에서 “부윤 조기영이, 고종 7년(1870)에 성첩과 포군을 수리하였는데 모두 조리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여기서 병인양요 이후 관방 시설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경주읍성에 대한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남긴 경주읍성에 대한 기록에서 “성벽 및 남문의 구조는 대부분 다른 것과 같지만 곡성을 이룬 것은 다른 데서 많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성벽은 평지에 축조한 것으로서 높이는 대략 20척 가량이며 약 30~40문 가량의 벽을 곳곳에 돌출시켰다. 소위 주10이다. 벽 바깥에는 다시 넓이 2문 가량의 마른 해자인 황(湟)을 뚫었다.”라고 언급하였다. 즉, 이 시기까지는 경주읍성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12년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寺內][^8]가 석굴암을 순시할 당시에 읍성 남문을 철거하고 남쪽으로 도로를 확장하여 노동과 노서로 나누는 도로가 만들어졌다. 1933년에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남긴 경주읍성의 기록에서는 성벽 대부분이 철거되어 잔해만 남아 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경주읍성이 훼손되었다.

각종 기록과 함께 고지도에서 경주읍성 내에 다양한 시설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된다. 읍성의 4문과 함께 내부에 일승각(一勝閣), 고각루(鼓角樓), 내아(內衙), 부창(府倉), 장교청(將校廳), 전결소(田結所), 필야헌(必也軒), 공고(工庫), 옥(獄), 동경관(東京館) 등의 관아와 부속 건물 등이 존재하였다. 그렇지만 현재는 경주 문화원에 일부 건물과 이전된 동경관 건물의 일부만 남아 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경주읍성은 1985년 이후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성벽과 내부 건물지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었다. 1985년에 성 내부의 추정 주전지에 대한 시굴 조사가 진행되었고, 1996년에는 서부동 2-30번지 유적을 조사하면서 읍성 서벽 기저부를 확인하였다. 1997년에는 서부동 19번지 유적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및 감옥을 확인하였다. 1998년에는 동부동 159-1번지 유적에서 연못, 도로 유구 등과 함께 금학헌(琴鶴軒)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조사되었다. 2004∼2005년과 2008년에 북문로 일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북벽에 3개소의 주4도 확인되었다.

2009년에 경주읍성에 대한 복원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2012년부터 한국문화재재단에 의해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 조사가 연차적으로 진행되어 성벽의 구조 등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었다.

경주읍성은 현재 석축성으로 보수 중이지만, 발굴 조사 과정에서 석성 이전에 토성의 존재가 확인된 바 있다. 이는 토성의 내탁부에 대한 단면 절개 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토성은 기저부 석열과 중심 토루 외측으로 내외피 주9가 조성되었다. 성벽 내외측 하단부에 석열이 확인되는데, 이는 고려시대 토성의 축조 기법과 유사하다. 이를 통해, 경주읍성이 토축으로 조성되었다가 조선 초에 석축으로 개수되었다는 기록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확인되는 석축 상태 경주읍성의 둘레는 2,412m이고, 평면 방형에 외측과 석축 내측은 주5 시설 역할을 하는 주6이 이루어진 편축식이다. 기저부와 성곽의 몸통을 이루는 성벽 몸체 부분의 면석은 기단석에서 내측으로 10~15㎝ 들여쌓기를 하였고, 1~4단 정도가 잔존한 상태이다. 주11의 경우 8단 정도까지 잔존한 구간이 7m 정도 확인되었다. 면석 1~4단은 길이가 20~80㎝, 두께가 10~15㎝ 정도인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바른 층 쌓기를 하였다. 면석의 안쪽에는 주17 또는 천석으로 높이를 맞추어 주7 한 흔적도 확인된다. 치성이 위치한 곳의 성벽 몸체 부분은 1~4단보다 상대적으로 큰, 길이 30~90㎝, 두께 20~40㎝ 정도의 석재와 이전 시기의 건축 부재 등을 사용하여 허튼 층 주12를 하였다.

의의 및 평가

신라의 왕경(王京)에 위치하면서 고려의 동경, 조선 경주부의 행정 주13인 경주읍성은 중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유적지이다. 2022년까지 동벽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며, 연차적으로 조사와 복원이 진행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원전

『문종실록』
『동경통지』
『동경잡기』

단행본

『경주읍성』 1(한국문화재재단, 2017)
『경주읍성』 2(한국문화재재단, 2018)
주석
주1

돌로 쌓아 만드는 일. 우리말샘

주2

일반 백성들이 사는 집. 우리말샘

주3

고쳐서 바로잡거나 다시 만듦. 우리말샘

주4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 성벽을 앞이나 옆에서 보호하는 구조물로서, 그 위에 성가퀴를 쌓았다. 우리말샘

주5

성 위에 오름. 우리말샘

주6

성이나 집, 담벼락 따위를 흙으로 쌓음. 또는 그렇게 쌓은 건축물. 우리말샘

주7

돌이나 벽돌을 쌓을 때에 그 틈서리에 시멘트나 모르타르를 채워 다지는 일. 우리말샘

주8

일본의 군인ㆍ정치가(1852~1919). 조선 통감이 되어 국권 강탈의 기초를 세웠으며 초대 조선 총독이 되었다. 조선과 중국에 대하여 제국주의 정책을 수행하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을 강행하였다. 우리말샘

주9

굴착 공사에서, 특정 부분의 지지물로서 임시로 지표에 남긴 커다란 덩어리. 우리말샘

주10

성문을 밖으로 둘러 가려서 구부러지게 쌓은 성. 우리말샘

주11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2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 우리말샘

주13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주14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5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臺). 우리말샘

주16

조선 시대에, 지방 관아에 있던 안채. 우리말샘

주17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윤성호(한성대학교)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