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우찬성, 경상도도체찰사,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와 활동사항
1422년(세종 4) 사간원우헌납이 되었고, 이어 좌헌납 · 병조정랑 · 의정부사인에 올랐다. 1428년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수재 상황을 살폈다. 1429년 사헌부집의에 올랐으며, 이듬해 결송사(決訟事)로 수금되어 원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버지의 소청으로 양주에 이치(移置)되었다.
1432년 승정원우부대언에 발탁되었다. 이후 좌부대언 · 우승지 · 좌승지가 되었으나, 곧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6년 충청도감사가 되었고, 1438년 이조참판 ·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43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9년 전제상정소제조(田制詳定所提調)를 겸대했고,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을 짓는 일을 감독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우찬성에 오르면서 계속 판이조사를 겸임했고, 충청 · 전라 · 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연변주현(沿邊州縣)의 성터를 살폈다. 1452년(단종 즉위년) 김종서(金宗瑞)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대신과 대간의 빈번한 청죄(請罪)가 계속되었지만,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 사사(賜死)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부터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 및 지방 읍성 축성, 현릉(顯陵) 조성 등을 맡았다.
1746년(영조 22) 김종서 · 황보 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86년(정조 10)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고, 1791년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해동잡록(海東雜錄)』
- 『대동기문(大東奇聞)』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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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고려ㆍ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ㆍ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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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임금이 몸소 과장(科場)에 나와 시험 성적을 살피고 급제자를 정하던 일. 또는 그 시험.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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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조선 시대에 둔 팔도의 하나. 태종 16년(1416)에 영길도를 고친 것인데, 성종 1년(1470)에 영안도(永安道)로 고쳤다가 중종 4년(1509)에 다시 함경도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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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1368년에 주원장이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영락제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와 남해에 원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뒤에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환관의 전횡과 당쟁, 농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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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임금이나 부모가 죽을 때에 남긴 명령.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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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저지른 죄에 대하여 벌을 줄 것을 청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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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사람의 재능과 도량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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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국가에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던 특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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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먼 지방. 또는 먼 곳.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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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 관가에 속하여 있던 노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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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 관직(官職)과 작위(爵位)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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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2
: 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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