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458년(세조 3) 성삼문(成三問) 등이 도모한 상왕복위계획이 탄로되어 영월에서 사사(賜死)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관을 갖추어 장사지낸 뒤 숨겨져왔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조심스럽게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묘의 영조(營造)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더니 선조 때에 이르러 김성일(金誠一) · 정철(鄭澈) 등의 장계로 영역(瑩域)을 수축하고 돌을 세워 표를 하였다.
1681년(숙종 7)에 이르러 대군(大君)으로 추봉하였고, 1698년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附廟)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상설(象設)은 추봉된 정릉[貞陵 : 태조의 계비 神德王后康氏의 능] 등의 예에 따라 난간과 무석(武石)을 설하지 않았고, 양식은 왕명으로 가장 간단하며 작은 후릉[厚陵 : 정종의 능]의 양식을 따랐다.
따라서, 장릉의 석물(石物)은 숙종과 정조 연간에 만들어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능석물의 선구를 이루며, 명릉[明陵 : 숙종의 능] 이래 만들어진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은 장릉에서 그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