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 · 우곡(愚谷). 아버지는 찬성사 정신중(鄭臣重)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 · 예조의 정랑,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1398년 9월 이첨(李詹) · 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곧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다. 1398년 조준(趙浚) · 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였다.
1400년(정종 2) 성균관악정(成均館樂正)이 되었으며, 병조의랑(兵曹議郎), 예문관의 직제학, 사성을 역임하였다. 1403년(태종 3) 대사성으로 승진하였고, 1405년 3월에 김과(金科)와 함께 생원시를 관장하였다. 1409년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를 거쳐 동지춘추관사를 겸임,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13년『태조실록』 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1418년 72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젊어서는 이색(李穡) · 정몽주(鄭夢周)의 문인과 교유하였고 늙어서는 성석린(成石璘) · 이행(李行)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는 시(詩)에 재능이 뛰어났다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교은집』 · 『화약고기(火藥庫記)』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