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산성 ()

건축
유적
국가유산
삼국 시대 신라 시대에, 축조된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일대에 있는 석축 성곽.
이칭
이칭
명활성(明活城), 경주 명활성(慶州 明活城)
유적
건립 시기
신라시대
관련 국가
신라
관련 인물
김유신
높이
13m
둘레
4,700m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보문동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보문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명활산성은 경주시 천군동의 흰등산과 서쪽의 장군봉, 내부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의 석축 산성이다. 둘레가 약 4.7㎞의 대형 산성으로 성벽의 높이는 13m로 추정된다. 5세기 이전에 토성으로 축조되었으나 석성으로 개축되어 7세기까지 운영되었다. 명활산성은 사료와 금석문을 통하여 풍부한 역사적인 기록을 전하는 산성이다. 경주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석축으로 개축된 산성으로 7세기 후반 이후에 폐성되었다는 점에서 6~7세기의 신라 축성 기술을 이해하는 기준점이 되는 산성이다.

정의
삼국 시대 신라 시대에, 축조된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일대에 있는 석축 성곽.
건립 경위 및 변천

명활산성은 경주시 천군동의 흰등산(해발 252m)과 서쪽의 장군봉, 내부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의 석축 산성이다. 명활산성은 둘레가 약 4.7㎞의 대형 산성이다.

명활산성이 초축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삼국사기』에서는 405년(신성마립간 4)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한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이보다 전에 명활성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파악해 볼 수 있다. 431년(눌지마립간 15)에는 왜인이 명활성을 포위하고 점령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어 대체로 5세기에 신라 왕경(王京)의 외곽을 방어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473년(자비마립간 16)에는 명활성을 수리하고, 475년에는 왕이 명활성에 옮겨 살았다고 하여 행궁으로 운영된 기록도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나제동맹 하에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항하다가, 백제 한성이 고구려에게 점유되고 삼국이 충돌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모호한 기록 때문에 실제 명활산성의 건립과 관련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554년(진흥왕 15)에 명활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593년(진평왕 15)에도 명활성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 보였다는 내용도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이 있는데 둘레가 1,906보라고 하여 둘레에 차이를 보이는 기록도 확인된다.

1975~1976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 호안석축(護岸石築)의 부재 중에서 『명활산성 작성비』 비편이 확인되었고, 1988년에는 명활산성 하단부의 무너진 성돌 중에서 두 번째 『명활산성 작성비』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명활산성은 신미년(551년, 진흥왕 12)에 축성되었다는 내용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명활산성은 수차례 개보수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679년에 축조된 월지에 『명활산성 작성비』가 재활용된 것은 647년 비담의 난 당시에 반란군이 명활산성을 점거하고, 김춘추( 태종무열왕)와 김유신 세력에게 진압된 이후 명활산성이 폐성되었을 가능성도 언급된 바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명활성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여기서 명활성은 고적조에 석축이고 둘레가 7,818척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폐성된 상태에서 석축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었다.

형태와 특징

명활산성은 북쪽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너져 상부에 토사가 매몰된 상태이다. 성은 남쪽의 흰등산을 중심으로 축조된 성벽과 이와 연결되어 북쪽 장군봉을 감싸는 두 개의 성벽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두 개의 성벽 구간을 토성과 석성 구간으로 나눈 견해가 있다. 실제로 기록을 통하여 5세기 중반경에 개축된 명활산성을 석성으로 파악하고 그 이전에 등장하는 명활성은 토성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에 북쪽 구간을 석성인 내성으로 남쪽 구간을 토성인 외성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반면에 남쪽 구간에 연결되어 두 성 중간의 공유 벽과 같은 구간은 토성 북벽의 흔적이고, 전체적으로 규모가 확장되어 석축성으로 개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성벽의 몸체 부분은 총 7개소의 문지(門地)와 4개소의 수구(水口)가 확인되었으나 붕괴가 심하여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북벽 외벽 하단부에서 약 13m 이격된 지점에서 해자도 확인되었다. 호안석축으로 추정되는 천석렬(川石列)이 노출되어 있으며, 석렬을 중심으로 성벽 방향으로는 자갈이 조밀하게 깔린 토층이 있었으며, 바깥쪽으로는 뻘층이 확인되었다. 전체적인 범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계곡부로 연결되는 북벽에 한정된 시설일 가능성이 있으며, 해자의 기능과 함께 집수지의 기능도 수행한 것으로 이해된다. 명활산성의 해자는 경주 지역에서는 월성 해자 외에 유일한 사례가 된다.

성 내부에는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6개소의 대지가 확인되는데, 초석이 확인되는 지점 1개소가 있지만 대부분 기와 편과 토기 편만 산포되어 있다. 연지(蓮池)는 2개소가 있으나 매몰된 상태이다.

발굴 경위 및 결과

1998년에 북쪽 성벽과 수구 구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고, 2012~2014년에 북문지 주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북문지와 동서쪽 성벽의 몸체 부분, 반원형의 곡성에 대한 2차 조사가 진행되었다. 협축식 성벽의 내외벽에서 보축과 보축부의 재보축 흔적이 확인됨에 따라 수차례 수개축이 이루어졌다는 기록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조사된 구간의 성벽 몸체 부분의 외벽 높이는 약 10m, 내벽의 높이는 약 9m, 성벽의 폭은 약 12.3m인데, 실제 성벽은 13m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은 장방형의 할석을 수직에 가깝게 바른 층 쌓기를 하였고, 내벽은 부정형의 할석을 하단부에 허튼 층 쌓기를 하다가 노출되는 구간은 바른 층 쌓기를 하였다. 전체적으로 남산신성이나 관문성에 보이는 장방형 또는 방형의 치석된 면석(面石)을 품(品)자형으로 바른 층 쌓기 하는 7세기 이후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문지는 초축 시 현문 방식으로 조성되었으나 후대에 등성 시설이 보축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북문지에서 북벽이 동쪽으로 회절하는 구간에서는 반원형의 곡성이 확인되었다. 곡성은 보은 삼년산성문경 고모산성소백산맥 일대의 신라 변경 요충지의 산성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시설이라는 점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방 시설 축조 기술의 흐름을 검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발굴 조사 시 명활산성에서 7세기 후반 이후의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성벽과 근접하여 7세기 후반으로 편년 되는 유물이 동반된 고분이 조성된 점 때문에, 비담의 난 이후에 명활산성이 폐기되었을 가능성도 높아졌다.

의의 및 평가

명활산성은 사료금석문을 통하여 풍부한 기록을 전하는 산성이다. 명활산성은 신라 왕경의 동쪽 지역을 방어하는 관방 시설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고, 경주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석축으로 개축된 산성이다. 그렇지만 7세기 후반 이후에 폐성되고 나서 전혀 재활용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정한 시기의 신라 축성 기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단행본

『명활성 긴급발굴조사보고서』(경주고적발굴조사단, 1990)
박방룡, 『신라도성』(학연문화사, 2013)
『명활성』(계림문화재연구원, 2017)

논문

이영재, 강재현, 「명활산성의 폐기 시기와 그 배경」(『신라사학보』 32, 신라사학회, 2014)
이원근, 『삼국시대성곽연구』(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0)
집필자
윤성호(한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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