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삼국 시대 신라 시대에, 축조된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일대에 있는 석축 성곽.
건립 경위 및 변천
명활산성이 초축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삼국사기』에서는 405년(신성마립간 4)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한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이보다 전에 명활성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파악해 볼 수 있다. 431년(눌지마립간 15)에는 왜인이 명활성을 포위하고 점령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어 대체로 5세기에 신라 왕경(王京)의 외곽을 방어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473년(자비마립간 16)에는 명활성을 수리하고, 475년에는 왕이 명활성에 옮겨 살았다고 하여 행궁으로 운영된 기록도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나제동맹 하에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항하다가, 백제 한성이 고구려에게 점유되고 삼국이 충돌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모호한 기록 때문에 실제 명활산성의 건립과 관련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554년(진흥왕 15)에 명활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593년(진평왕 15)에도 명활성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 보였다는 내용도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이 있는데 둘레가 1,906보라고 하여 둘레에 차이를 보이는 기록도 확인된다. 1975~1976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 호안석축(護岸石築)의 부재 중에서 『명활산성 작성비』 비편이 확인되었고, 1988년에는 명활산성 하단부의 무너진 성돌 중에서 두 번째 『명활산성 작성비』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명활산성은 신미년(551년, 진흥왕 12)에 축성되었다는 내용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명활산성은 수차례 개보수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679년에 축조된 월지에 『명활산성 작성비』가 재활용된 것은 647년 비담의 난 당시에 반란군이 명활산성을 점거하고, 김춘추(태종무열왕)와 김유신 세력에게 진압된 이후 명활산성이 폐성되었을 가능성도 언급된 바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명활성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여기서 명활성은 고적조에 석축이고 둘레가 7,818척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폐성된 상태에서 석축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었다.
형태와 특징
발굴 경위 및 결과
조사된 구간의 성벽 몸체 부분의 외벽 높이는 약 10m, 내벽의 높이는 약 9m, 성벽의 폭은 약 12.3m인데, 실제 성벽은 13m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은 장방형의 할석을 수직에 가깝게 바른 층 쌓기를 하였고, 내벽은 부정형의 할석을 하단부에 허튼 층 쌓기를 하다가 노출되는 구간은 바른 층 쌓기를 하였다. 전체적으로 남산신성이나 관문성에 보이는 장방형 또는 방형의 치석된 면석(面石)을 품(品)자형으로 바른 층 쌓기 하는 7세기 이후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문지는 초축 시 현문 방식으로 조성되었으나 후대에 등성 시설이 보축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북문지에서 북벽이 동쪽으로 회절하는 구간에서는 반원형의 곡성이 확인되었다. 곡성은 보은 삼년산성과 문경 고모산성 등 소백산맥 일대의 신라 변경 요충지의 산성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시설이라는 점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방 시설 축조 기술의 흐름을 검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발굴 조사 시 명활산성에서 7세기 후반 이후의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성벽과 근접하여 7세기 후반으로 편년 되는 유물이 동반된 고분이 조성된 점 때문에, 비담의 난 이후에 명활산성이 폐기되었을 가능성도 높아졌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삼국사기』
- 『신증동국여지승람』
단행본
- 『명활성 긴급발굴조사보고서』(경주고적발굴조사단, 1990)
- 박방룡, 『신라도성』(학연문화사, 2013)
- 『명활성』(계림문화재연구원, 2017)
논문
- 이영재, 강재현, 「명활산성의 폐기 시기와 그 배경」(『신라사학보』 32, 신라사학회, 2014)
- 이원근, 『삼국시대성곽연구』(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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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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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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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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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 온조왕 14년(5)에 이곳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경기도 광주의 옛 읍과 남한산성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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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성을 쌓는 데 쓰는 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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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호수, 하천, 강 주변의 흙이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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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여러 가지 재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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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개흙’의 방언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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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흐르는 물 또는 빗물을 저장하는 지역.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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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 경상북도 경주 월성의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 해자 및 초기 신라 시대의 집터와 대형 건물터 따위가 확인되었다. 경주 월성의 서쪽 문으로 추정되는 위치에서 각종 토기, 골각기, 목기, 곱은옥 따위가 나왔는데, 그 양상이 통일 신라 시대의 유물과는 다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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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 집터로서의 땅.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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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2
: 연못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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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3
: 성문을 밖으로 둘러 가려서 구부러지게 쌓은 성.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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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4
: 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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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5
: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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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6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의 북쪽에 있는 신라 때의 산성. 진평왕 13년(591)에 쌓았다고 전하며, 문무왕 19년(679)에 고쳐 쌓았다. 성안에는 세 개의 큰 창고를 두어 무기와 식량을 저장하였으며, 성을 쌓으면서 남긴 남산 신성비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 사적 정식 명칭은 ‘경주 남산 신성’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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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7
: 돌을 다듬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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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8
: 문의 바닥이 일정 높이에서 시작되는 형식으로 다락문처럼 만들었으며 성문을 통해 출입하고자 할 때는 사다리 같은 도구를 활용하도록 만들어진 성문. 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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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9
: 연대순으로 역사를 편찬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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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0
: 흩어져 퍼지거나 흩어 퍼뜨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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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1
: 아래위로 여닫게 되어 있는 문.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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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2
: 성 위에 오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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