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산성 작성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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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활산성 작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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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명활산성 축성 후 건립한 비. 작성비(作城碑).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명활산성 작성비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명활산성 축성 후 건립한 비이다. 작성비는 축성에 대한 책임을 명백히 하고 축성 참가자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551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에서는 591년에 세워진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이후 처음 발견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66.8㎝, 최대 너비 31.0㎝, 두께 16.5㎝이며 직사각형이다. 비문에는 작성 간지,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실무자의 인명, 공사 기간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 비는 신라 중고기의 역사상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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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명활산성 축성 후 건립한 비. 작성비(作城碑).
개설

1988년 8월 26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전 56번지의 명활산성 성벽 터에서 농부 김규식(金奎植)이 발견했으며,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명활산성은 신라 왕경(王京)의 동쪽에 있었으며 나성(羅城)의 구실을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05년(실성왕 4) 이전에 이미 축성되어 있어 나성의 기능을 가진 산성으로는 최초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자비왕(慈悲王)과 소지왕(炤知王) 때에는 국왕의 거성(居城)으로 사용되기까지 했던 비중이 컸던 성곽이었다.

성벽은 길이가 약 5㎞인 토성과 약 4.5㎞인 석성(石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석성의 북서쪽 성벽에서 축조 당시의 기록이 적힌 이 비가 발견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66.8㎝, 최대 너비 31.0㎝, 두께 16.5㎝이며 직사각형이다.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거의 꽉 차도록 각자(刻字)되었으며, 명문의 필획이 깊은 것으로 볼 때 글자를 새긴 것이 분명하다. 서체는 육조풍(六朝風)의 예의(隷意)가 있는 해서체이며, 자경(字徑)은 1.5∼2.5㎝이다.

내용

비문은 ①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②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③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④공사 담당 위치, ⑤작성 참가자의 수, ⑥공사 기간, ⑦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의 건립 연대는 첫 머리의 ‘(辛)未年’이라는 간지로 보아 551년(진흥왕 12)으로 추정된다. 비문의 구성이나 서체로 볼 때 1주갑(周甲) 늦추어 611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관등표기로 볼 때 551년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를 들면, 비문에 신라 17등 경위(京位) 가운데 제14등인 길사(吉士)의 이칭(異稱)인 길지(吉之)가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6세기 금석문은 거의 길지가 사용된다. 524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서 길지지(吉之智)로 표기되다가 568년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가운데 「마운령비(摩雲嶺碑)」와 「황초령비(黃草嶺碑)」에는 지(智)가 탈락된 길지가 보인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 6세기 초에는 길지지(吉之智)라고 하다가 그 후 어느 시기엔가 지(智)가 탈락되고 길지가 점차 정식표기로 정착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591년 「경주 남산 신성비(慶州 南山 新城碑)」(이하 「남산 신성비」)에서 처음으로 길사가 나타나기 때문에 「명활산성작성비」는 일단 6세기 이후로 내려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축성시 비석을 세우는 것은 책임 한계를 명백히 하고 축성에 참가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신라 영역에서 이러한 작성비는 591년의 「남산 신성비」가 여러 개 발견되었으나 명활산성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 중고기(中古期)의 역역(力役) 동원 체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즉, 이 비석과 성격이 같은 「남산 신성비」에는 1개 비석에 1개 집단만 기록되어 있는데, 「명활산성작성비」에는 1개 집단이 3개의 소분단(小分團)으로 편제되어 있다.

또 이 비석에는 축성에 소요된 공사 기간이 35일로 기록되어 있어, 1개의 성곽을 축조하는 데 종래의 견해처럼 수개월이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축성의 난이도를 감안해 볼 때, 이 기간을 명활산성 전체를 완성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높이 10보(步), 길이 14보 3척(尺) 3촌(寸)의 거리를 35일 만에 완성했다는 한정된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비에는 그 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 상인나두(上人邏頭)’ · ‘장인(匠人)’ · ‘서사인(書寫人)’ 등의 직명이 보이며, 특히 ‘ 군중상인(君中上人)’이라는 글자가 있어, 「남산 신성비」 제2석에서 지금까지 판독하지 못하였던 ‘군중□□(郡中□□)’을 완독할 수 있게 되었다.

상인나두에서 나두는 성 · 촌을 단위로 파견된 지방관으로, 상인은 ‘윗사람’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또, 장인은 지방민으로 축성을 담당하는 기술자, 서사인은 문자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문서를 담당하는 기술자, 군중상인은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의 윗사람 즉 촌주(村主)로 추정된다.

「명활산성작성비」와 「남산 신성비」의 비교를 통해 551년에서 591년에 걸치는 40년 동안 신라의 촌락지배가 강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라가 촌락지배를 실현해 가는 수단으로 창출해 낸 것이 외위(外位)라는 지방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관등체계였다. 외위는 복속세력의 질서를 신라적으로 전화하여 일원적인 촌락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6세기를 통하여 적절히 이용되었다. 「명활산성작성비」와 「남산 신성비」는 외위 11등 체계가 거의 완성된 이후의 것인 점에서는 같지만 둘을 비교하면 재지세력의 외위 소지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명활산성작성비」에 보이는 군중상인은 촌주이면서도 관등은 7등인 하간지(下干支)에 머물러 있다. 반면 591년의 「남산 신성비」에서 촌주는 5등인 찬간(撰干)이다. 또 「명활산성작성비」에서는 2명의 하간지가 보이는 반면 「남산신성비」에서는 적어도 4명의 간군(干群) 소지자가 보인다. 이렇게 「명활산성작성비」에서는 간군이 소수인 점, 그 등급이 낮은 점, 그리고 관등 소지자의 수가 비교적 적은 점 등에서 보아 6세기 전반의 성격을 많이 지닌 반면, 「남산 신성비」에서는 그와는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명활산성작성비」에서 외위체계가 지방 촌락지배에 이용된 초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남산 신성비」는 신라의 촌락지배가 급속히 강화되어 그 절정에 달한 시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명활산성작성비」는 「남산 신성비」와 공통되는 점이 많아 양자를 서로 보완하여 신라 중고기의 역사상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금석문과 신라사』(주보돈, 지식산업사, 2002)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의 검토(檢討)」(박방룡, 『미술자료(美術資料)』41, 국립중앙박물관,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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