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신성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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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신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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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 시기에 경주 남산에 쌓은 성곽 관련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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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 시기에 경주 남산에 쌓은 성곽 관련 기념비.
내용

1934년부터 1994년까지 경주부근에서 모두 9기가 발견되었다. 이들 비석의 발견 지점은 각각 다르나 모두 남산에 성을 쌓고 세운 비이기 때문에, 발견 순서에 따라 남산신성 제1비에서 제9비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제1비와 제9비는 완형이나 제2·3비는 상하 2편으로 절단되었고, 제4·5·6·7·8비는 단편으로 발견되었다. 형태와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자연판석에 각자(刻字)할 부분만 약간 마연해 비문을 새기고 밑에는 공간을 남겨두어 땅에 묻어서 설 수 있게 하였다.

크기는 제1비가 높이 91㎝, 최대너비 44㎝, 제2비는 높이 121㎝, 최대너비 47㎝, 제3비는 높이 80.5㎝, 윗너비 30㎝, 아랫너비 23㎝, 제4비는 현재 높이 51㎝, 현재 너비 34㎝, 제5비는 현재 높이 23㎝, 현재 너비 23㎝, 제6·7·8비는 소편이며, 제9비는 높이 90.0㎝, 최대너비 39.0㎝이다.

비문은 고졸(古拙)한 서체로 음각했고, 행수(行數)와 각 행의 자수(字數)는 일정하지 않다. 제1비는 9행 171자, 제2비는 11행 183자, 제3비는 6행 115자, 제4비는 10행 60자, 제5비는 7행 43자, 제6·7·8비는 원래의 행수 및 자수가 분명하지 않으나 제6비가 현재 3행 11자, 제7비는 4행 18자, 제8비는 1행 2자가 남아 있다. 그리고 제9비는 10행 155자이다.

내용은 각 비가 3단으로 구분되는데 대체로 동일한 체재를 취하고 있다. 제1단은 건립연월일과 서약문으로서 건립연월일은 모두 신해년(辛亥年) 2월 26일로 동일하므로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산신성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 문무왕 3년조에 비로소 보인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의 “별본(別本)에 말하기를 건복(建福) 8년 신해년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0보(步)였다.”라는 기사에서 신해년을 591년(건복 8년, 진평왕 13)에 비정할 수 있기 때문에 비석들은 이 때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비문에 축조 후 3년 이내에 무너지면 벌받을 것을 서약하고 있다. 제2단은 서약을 하고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직명(職名)·출신지·인명·관등명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참여인원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 구성되었다.

① 도사(道使)·나두(邏頭)의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국가의 명령을 지방민에게 전달하고, 축성작업에 대하여 총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② 촌주(村主)·장척(匠尺)·문척(文尺) 등의 직을 가진 자로서, 지방관의 명령을 받아 직접 노동력을 동원하고, 또 축성작업을 실제로 일선에서 지휘, 감독한 사람들이었다.

③ 인력동원의 지역적 범위로서, 현재까지 발견된 비석의 내용으로 볼 때, 현재의 함안(咸安)·의령(宜寧)·의성(義城)·상주(尙州)·옥천(沃川)·선산(善山)·영풍(榮豊) 등에 걸쳐 있고, 각 비석에는 일정지역이 밀집되어 있어 축성작업이 각 지역별로 분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제3단은 작업분단(作業分團)의 축성거리를 명시하고 있다. 제1비는 11보 3척 8촌(寸), 제2비는 7보 8척, 제3비는 21보 1척, 제4비는 9보, 제9비는 6보를 축성하였다. 이 같은 축성거리의 차이는 지형에 의한 공사의 난이도를 감안한 결과로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남산성의 둘레는 2,800보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5비의 수작(受作)거리를 평균하면 12보 2척 정도이니, 남산신성의 축조에는 적어도 2백여 작업분단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남산신성비는 현재 발견된 것보다 훨씬 많은 수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산신성비는 비록 소형이지만, 삼국시대 금석문으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우선 신라 중고기의 지방통치체제와 역력(役力) 동원체제 및 지방민의 신분구성, 촌락민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사회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비문의 첫머리에서 공통적으로 축조 후 3년 이내에 붕괴되면 벌받을 것을 서약하고 있음은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귀중한 자료이다.

남산신성비 제9비는 1994년경주시 배동 창림사지(昌林寺址) 동쪽 약 4백m 떨어진 남산신성의 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었다. 앞서 발견된 제7비와 제8비가 성내(城內)에서, 나머지는 남산신성에서 멀리 떨어진 민가(民家)에서 발견되어 출토정황을 알 수 없었다.

제7비와 제8비 또한 성안에서 발견되었지만 파편상태이고 지표 채집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상태로 비석을 세웠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제9비는 비석의 앞쪽이 성내를 향했고, 안쪽 성벽에 반듯하게 놓여있었음이 확인되어 이 같은 의문점이 해소될 수 있었다. 또한 이 비석은 이제까지 알려진 역력체제와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남산신성비의 인명분석 결과 A·B·C·D 4개의 집단으로 분류되었던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A집단이 없고, 대신 급벌군(伋伐郡)이라는 군명(郡名)이 있다다.

앞서 발견된 남산신성비에서의 A집단은 왕경(王京)에서 지방으로 파견된 지방관(地方官)의 인명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었으나 이 형식을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인명표기방식에 있어서 6세기대 금석문의 표기방식과 같으나, 직명(職名)에 관계없이 앞의 인명과 출신지가 같을 경우 ‘동촌(同村)’이라 표기하고 있어 특이하다.

이러한 용례는 제5비와 제6비에서도 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쓰임새를 모르거나 다른 글자로 잘못 판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제9비는 정확한 위치와 출토정황이 파악되었을 뿐 아니라, 남산신성의 체제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특이한 체제임이 밝혀졌다는데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한국금석유문』(황수영, 일지사, 1976)
『한국금석전문』(허흥식, 아세아문화사, 1984)
『역주한국고대금석문』 2(한국고대사회연구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남산신성비의 종합적고찰」(진홍섭, 『역사학보』 26, 1965)
「남산신성비를 통해본 신라의 지방통치체제」(이종욱, 『역사학보』 64, 1974)
「신라중고의 지방통치조직에 대하여」(주보돈, 『한국사연구』 23, 1979)
「신라중고 금석문의 인명표기 Ⅱ」(김창호, 『역사교육논집』 4, 1983)
「남산신성비 제8비·제9비에 대하여」(박방룡, 『미술자료』 42, 국립중앙박물관, 1988)
「新羅의 金石文」(田中俊明, 『韓國文化』 5·6·7·8·9, 韓國文化院, 1983·1984)
「6세기말 신라의 역역동원체계-남산신성비의 기재양식에 대한 검토-」(하일식, 『역사와 현실』 10, 1993)
「남산신성의 축조와 남산신성비-제9비를 중심으로-」(주보돈, 『신라문화』 11·12합집, 1994)
「남산신성비 제9비에 대한 검토」(박방룡, 『미술자료』 53, 국립중앙박물관, 1994)
「경주남산신성의 연구」(박방룡, 『고고력사학지』 10, 동아대학교박물관, 1994)
「남산신성비의 역역편성과 군중상인」(이수훈, 『부산사학』 30, 1996)
「신라 남산신성 축성역의 ‘도상인’분단」(이문기, 『석오윤용진교수정년퇴임기념논총』, 1996)
「남산신성비 제9비의 재검토」(김창호, 『부산사학』 30, 1996)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진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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