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9.3m.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돌을 벽돌[塼]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서,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국보, 1962년 지정)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층과 3층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屋蓋石)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를 삼고 아래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落水面) 층단이 있다.
받침은 초층부터 6단, 6단, 5단이며, 낙수면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이고, 3층상면은 층단으로 방추형을 만들었으며, 그 정상에는 화강석으로 된 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 때 제2층과 제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각종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은제의 바늘, 침통(針筒)·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상평오수(常平五銖) 등 옛 화폐가 발견되어 고려 숙종 내지 예종 연간에 탑이 조성되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가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