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3년(470년)조에 따르면, “삼년산성을 쌓았다. 삼 년이라 한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공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라는 내용이 전해진다. 또한 소지마립간 8년(486년)에는 “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고 일선군(一善郡) 지역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과 굴산성(屈山城) 두 성을 고쳐 쌓았다”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삼년산성(三年山城)이 470년에 처음 완공된 후 486년에 보수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에 삼년산성이 축성된 연대와 수축한 연대는 물론 축성 기간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6세기 중엽 통일 신라가 추풍령로를 통해 북진하는 과정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삼국통일 전쟁 당시에 삼년산성은 신라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660년 9월 당 황제의 조서를 신라 태종무열왕에게 전달하는 의식이 이곳 삼년산성에서 거행되었다.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이 삼년산성을 공격했으나 후백제를 이기지 못하는 등 후삼국시대에도 삼년산성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 산성을 오항산석성(烏項山石城)으로 불렀는데,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둘레는 1천 2백 20보이며 험조하다. 안에 샘이 6개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군창(軍倉)이 있다”라고 하여 조선 초기까지 산성이 계속 경영되었던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古跡)조에는 오정산성(烏頂山城)으로 나오는데,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6백 99척이요, 높이가 18척이며, 성안에 우물 다섯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반은 무너졌다”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삼년산성의 존재가 다시 언급되기도 하였다.
삼년산성은 1979년 기초 조사를 시작으로 총 9차례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산성의 구조와 성격 등 대략적인 현황이 밝혀졌으며, 무너진 성벽에 대한 복원 작업도 이루어졌다.
삼년산성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오정산에 축조된 성곽으로,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석축 산성이다. 이곳은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금강 수계권 및 남한강 수계권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북쪽은 풍취리, 서쪽은 성주리, 동쪽은 대야리가 산성을 둘러싸고 있으며, 능선에 세워진 성벽이 각 리의 경계를 이룬다. 삼년산성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서쪽으로 열린 계곡을 둘러싼 고로봉형(栲栳峰形) 산성이다. 산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성벽을 기초를 세우고 낮은 계곡에 성문과 수구를 개설하는 등 삼년산성은 우리나라 산성 축조 방식의 기본을 잘 보여준다.
삼년산성의 평면은 대략 네모꼴을 이루고 있으며, 산성의 전체 둘레는 약 1,700m이다. 성벽의 경우 외측 성벽이 400420m, 내측 성벽이 약 450m 정도 남아 있다. 성벽은 체성벽(体城壁)과 체성벽 외측 하부의 기초보축성벽, 성벽 상면의 여장(女牆)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삼년산성은성벽의 전체 구간을 내외 겹축으로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정자형(井字形) 쌓기와 품자형(品字形) 쌓기로 만든 것이 확인되었다. 외측 성벽의 높이는 구간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계곡부를 통과하는 성벽은 약 2021m, 능선부를 통과하는 성벽은 14~15m 정도의 높이로 축조되었다. 성벽은 대체로 80∼87°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성벽의 전체적인 단면 형태는 곡선형을 이루고 있어 매우 안정적으로 보인다. 체성벽의 외측 하부에는 전체 구간에 걸쳐 기초보축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삼년산성에서는 1겹의 보축성벽뿐 아니라 성벽이 2겹으로 축조된 구간도 확인된다. 이는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로 곡성(曲城)을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초보축성벽은 대체로 6m 높이로 축조되었으며, 기울기는 약 60∼62°를 유지하고 있다. 성벽 상면의 여장은 평여장(平女牆))으로 남문지 동쪽 계곡부 성벽에서 확인된다. 너비 105∼110㎝, 높이 70∼80㎝ 규모의 여장이 남아 있다. 또한 삼년산성에서는 곡성(曲城)이라 부르는 반원형의 치성(雉城)도 확인되었다. 현재 지표상에서 확인되는 곡성은 모두 10개소 정도 되는데, 모두 적의 접근이 용이한 능선이나 방어상 취약한 지점인 성문 근처에 배치되어 있다.
성문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확인되었다. 북문지를 제외한 서문지 · 남문지 · 동문지는 계곡 중심부에서 약간 한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설치되었으며, 동문지와 남문지는 현문식 성문으로 축조되었다. 수구는 동문지 남쪽 계곡부의 잔존 성벽에서 확인되는데, 성벽 통과식 구조로 만들어졌다.
발굴 조사를 통해 성 내부에서 아미지(蛾眉池)를 비롯한 여러 저수 시설을 확인하였다. 건물지(建物址)는 약 48개소 정도가 확인되었다. 삼년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중 성문의 회전축으로 사용했던 암수 확쇠가 주목되는데, 남문지 주변에서 암수 확쇠가 결합된 채로 수습되었다. 또한 확쇠 주변에서 성문의 철판을 고정시키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철정(鐵釘)도 출토되었다.
삼년산성은 문헌 사료에 축성 시기 및 운영 시기가 명확하게 기록된 산성으로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서 기준이 되는 산성이다. 또한 이 산성은 6세기 중엽 신라의 북진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유적이다. 최근 옥천 이성산성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5~6세기 대 판축 공법과 7세기 대 토성 외면 축성 양식의 변화 과정이 확인된 바 있는데, 삼년산성 역시 향후 조사를 통해 축성술의 변화 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