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마립간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58~479년이며, 눌지마립간 재위시 마련된 왕위의 부자상속제에 따라 즉위했다. 왕경인 경주의 행정체계를 개편해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백제와의 공수동맹을 더욱 강화했다. 474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하자 원병을 파견했으나 군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백제의 한산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했다. 이후 고구려가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변을 공략하자 서북변 일대에 산성을 축조하여 대비했고, 수차례에 걸친 왜의 침략도 모두 격퇴했다.
성은 김씨이며,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의 딸 김씨이다. 왕비는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아들이었던 미사흔(未斯欣)의 딸 김씨인데, 461년(자비마립간 4)에 맞아들였다. 눌지마립간 재위시 마련된 왕위의 부자상속제에 따라 즉위해 보다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었다.
당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래의 족제적(族制的)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6부(六部)를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469년에는 왕경(王京)인 경주를 지역적으로 구분해 방리명(坊里名)을 확정하였다. 이로써 왕경은 족제적 성격을 탈피하고 행정적 성격이 강한 지역이 되었다. 방(坊)과 리(里)는 6부의 하부 행정구역으로, 전성기의 신라 서울은 1,360방 혹은 360방, 55리로 되어 있었다. 방과 리의 관계는 방을 리보다 상위 행정구역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리가 방보다 큰 행정구역으로 부(部)-리(里)-방(坊)의 계통체계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국내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고구려의 남진정책(南進政策)에 대비해 눌지마립간 때에 체결되었던 백제와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보다 강화하였다.
474년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백제를 공격하자 위기에 처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이 아들 문주(文周)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동수동맹에 입각해 백제에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병이 백제에 이르기도 전에 백제의 한산성(漢山城: 漢城)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자비마립간 11년(468년) 말갈(靺鞨)의 1만 군사와 함께 신라의 실직성(悉直城: 강원도 삼척)을 침략한 후 동해안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신라 북변을 공략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이 증대되자 자비마립간은 백성을 징발해 니하(泥河) · 삼년산성(三年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 · 모로성(芼老城) · 일모성(一牟城) · 사시성(沙尸城) · 광석성(廣石城) · 답달성(沓達城) · 구례성(仇禮城) · 좌라성(坐羅城) 등 일선지대의 요새지에 새로이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들 지역은 주로 신라 서북변의 소백산맥 일대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남하를 방비하고, 아울러 이미 확보한 점령지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를 꾀하였다. 한편 몇 차례에 걸쳐 왜(倭)가 침입했는데 모두 효과적으로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463년에는 삽랑성(歃良城: 지금의 梁山)을 침범하고 물러가는 왜병(倭兵)을 크게 격파하였다. 왕은 왜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연해지방의 두 곳에 성을 쌓았고,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해 이에 대비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