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는 통일신라가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를 이은 고려 등 3국이 정립하였던 900~936년 시기이다. 신라 말 호족의 대두와 농민 봉기로 인한 혼란 속에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망명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은 한국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후삼국은 신라에서 고려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존재했던 세 나라를 가리킨다. 따라서 후삼국시대라는 것은 왕조사적 시대 구분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그 시대적 특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하기 어렵다.
또한, 남북국시대론의 입장에서 신라가 분열하여 후삼국이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후삼국시대의 설정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현재로서는 ‘시대’라고 하기보다는 ‘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 중대 말부터 본격화한 진골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은 하대에 들어 가열되었다. 그중에서도 822년( 헌덕왕 14)에 일어난 김헌창(金憲昌)의 난은 의미가 크다. 그는 신라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내세웠는데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헌창은 훗날 나라를 세운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선구적인 존재였다. 836년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수년 동안 왕위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에 균열이 생겼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하였다.
889년( 진성여왕 3) 지방에서 조세를 보내지 않아 국가 재정이 비는 일이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사신을 보내 조세를 독촉하였다. 이에 항거하여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원종(元宗)과 애노(哀奴)는 상주(尙州: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봉기하였는데, 진압을 위해 왕이 파견한 관리는 이들의 위세에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하였다. 중앙정부가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음이 폭로되었고 봉기는 계속되었다.
호족들은 농민들의 봉기에 맞서 성(城)을 쌓고, 사병(私兵)을 두어 자기가 지배하는 지역을 지켰다. 이들은 성주 혹은 장군을 자칭하였는데, 점차 군현의 지방관을 대신하였다. 이들의 권력은 대를 이어 세습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호족들은 중앙정부를 본뜬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추었다. 지역 내 농민들로부터 조세와 역역을 거둬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들은 국왕이 파견한 지방관과는 달리 독립적인 존재들이었다. 신라의 지배력이 직접 미치는 지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견훤은 서남해 군진(軍鎭)의 방수군(防戍軍) 비장(裨將)으로 출세하였다. 그는 889년(진성여왕 3) 농민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나자 야심을 품고, 세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892년(진성여왕 6)에는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신라의 9주(州) 가운데 하나인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광역시)의 동남쪽 군현들을 장악하고, 그 치소(治所)인 무주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점차 세력 범위를 전주(全州: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와 웅주(熊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로 확대하였다. 무주, 전주, 웅주는 옛 백제 지역에 설치된 것이었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에는 백제 유민의 후예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견훤은 이를 이용하여 900년( 효공왕 4) 전주에서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고 선언하고, 백제왕을 칭했다. 본래 국호는 백제였지만, 삼국시대 백제와 구별하여 후백제라고 한다.
궁예는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달사(世達寺)의 승려였다. 그는 혼란이 계속되자 891년(진성여왕 5) 절을 떠나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에 해당하는 죽주(竹州: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를 거점으로 한 반신라적인 세력가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 이어 892년(진성여왕 6)에는 북원(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의 반신라적인 세력가 양길(梁吉)에게 투신하였다.
894년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에 입성하여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어 철원(鐵圓: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지역으로 진출하여 크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900년(효공왕 4)에는 양길의 세력권을 흡수하였다. 그가 근거하였던 지역 중에는 옛 고구려 영역이 적지 않았다. 궁예는 901년(효공왕 5) 고구려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고려를 건국하였다.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던 것은 한 해 전에 후백제가 건국하여 신라와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졌음도 고려해서였다. 이 고려를 삼국시대의 고구려[후기에는 고려라고 하였음],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여 후고구려라고 부른다.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한 관부와 관직 그리고 관등을 정비하였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세력 범위도 확대하였다. 904년에 공주(公州)의 장군 홍기(弘奇)가 항복하였다.
궁예는 충청남도 방면에서 후백제를 압박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 해에 패강도(浿江道)의 10여 주현(州縣)이 투항하였다. 905년에는 패서(浿西) 13진을 분정(分定)하였다. 평양의 성주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甑城: 지금의 평안남도 강서군)의 적의황의적(赤衣黃衣賊) 명귀(明貴) 등이 와서 귀부하였다. 이로써 북방의 배후 지역이 안정되었다.
905년에는 신라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죽령(竹嶺)의 동북 지역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효공왕(孝恭王)은 성주들에게 방어만 할 것을 명령하였을 뿐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906년에는 왕건을 상주 사화진(沙火鎭: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 보내 견훤과 여러 차례 싸워 이겼다.
궁예는 상주 일대를 차지함으로써 신라를 위협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고 금성(金城: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을 멸도(滅都)로 부르게 하는 등 반신라 정책을 강화하였다. 부석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초상화를 칼로 쳤던 것도 이때의 일로 추정된다. 이에 견훤은 907년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이남 10주현을 차지하고 궁예에 맞섰다.
궁예는 909년부터 912년까지 나주(羅州: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견훤과 여러 차례 격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견훤이 내륙 방면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는 것을 배후에서 억제할 수 있었다. 아울러 후백제가 해상을 통해 다른 나라들과 통교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었다. 태봉은 후삼국의 판도 중 2/3가량을 차지하였다.
911년 궁예는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바꾸었다. 이때 정부 조직도 개편하였다. 광평성 시중(侍中)의 정치적 지위는 격하되었던 반면 왕명을 받드는 내봉성(內奉省)의 지위는 크게 올랐다.
궁예는 전제왕권을 추구하였다. 이에 더하여 미륵불을 자칭하였다. 그는 국왕이자 미륵불로 신정적(神政的) 전제주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으로 남의 마음속 비밀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는 중앙의 관리나 군인들, 지방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신정적 전제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과중한 조세를 부담했던 농민들도 불만이 컸다. 결국 918년 6월 정변이 일어나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 죽고, 왕건이 즉위하였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로 환원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견훤은 왕건이 즉위하자 축하 사절을 보내는 등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한편으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즉, 920년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을 함락하고 진례군(進禮郡)으로 진격하였다.
진례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로 비정된다. 견훤은 신라 왕경(王京)인 금성을 겨냥하였던 것이다. 이에 경명왕(景明王)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전에 이미 왕건과 경명왕은 통교하고, 동맹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에 견훤은 회군하였다.
925년 견훤과 왕건은 조물군(曹物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안동시, 김천시, 의성군 등 여러 설이 있음)에서 휴전하고 인질을 교환하였다. 견훤은 고려 ‧ 신라 동맹에 대항해 일본,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어 군사적 협조를 얻으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에 927년 11월 금성을 전격 침공하였다.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경애왕(景哀王)을 자살하게 하고,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물러나는 길에 왕건이 이끄는 부대를 공산(公山: 지금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부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왕건은 김락(金樂), 신숭겸(申崇謙) 등 휘하 장군들을 잃었고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이후 견훤은 강주(康州: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를 차지하고, 고려와 신라를 잇는 죽령로의 요지인 오어곡성(烏於谷城: 지금의 경상북도 군위군)을 점령하였다. 또한, 왕건의 심복이었던 의성부(義城府: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성주장군 홍술(洪述)을 패사(敗死)시켰다. 금성 침공 후 한동안 후백제가 우세를 점하였다.
수세에 몰렸던 왕건은 930년 1월 고창(古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견훤에게 일격을 가하였다. 곧이어 그 일대 30여 군현이 차례로 왕건에 귀부하였다. 9월에는 동해안 일대의 110여 성이 왕건의 편이 되었다. 당시 신라는 쇠망하고 있었지만 그 상징적 지위는 높았다.
왕건은 신라왕의 제후를 자처하였다. 견훤마저도 존왕(尊王)의 의리를 지키려는 마음이 돈독하다고 할 정도였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은 금성을 침공하고 경애왕을 죽게 함으로써 명분을 저버린 견훤보다는 신라의 보호자로 나섰던 왕건을 지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후백제와의 패권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였다.
932년 매곡현(昧谷縣: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군) 장군 공직(龔直)이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그는 견훤의 심복이었다. 여러 자녀들을 인질로 후백제에 보냈다. 하지만 견훤은 이들의 출세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곡현의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도 걱정해야 하였다. 공직은 자녀들이 위험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견훤을 배반하였다. 왕건은 공직을 크게 우대하였다.
934년 왕건은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견훤이 이끈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에 웅진 이북 30여 성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이들 중에는 공직처럼 견훤의 처우에 불만을 품었던 호족들이 적지 않았다. 이로써 전세는 고려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견훤은 여러 부인 사이에서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중 장남 신검(神劍)과 그 밑의 두 아들, 즉 양검(良劍)과 용검(龍劍)은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참전하는 등 공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견훤은 넷째아들인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신검과 두 동생은 935년 정변을 일으켰다.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에 가두고 즉위하였다. 이에 견훤은 얼마 후 고려에 망명하였다. 상황이 고려에 크게 유리해지자, 이 해 11월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종말을 맞았다.
936년 9월 왕건은 견훤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신검은 일선군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하지만 후백제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이전에 이미 견훤의 사위이자 장군이었던 박영규(朴英規)는 비밀리에 왕건에게 서신을 보내 후백제를 공격하면 자신이 내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참전한 장군들 중 일부는 싸우지도 않고 견훤에게 투항하였다. 왕건은 신검을 추격하여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성 부근에 이르렀다. 이에 신검은 결국 항복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신라는 통일 후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포섭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세기 들어 멸망한 지 200년 이상이 지난 백제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는 나라들이 나타났다.
삼국의 민을 하나로 묶는 데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이러한 이질감은 상당히 해소되었다. 13세기를 전후해서 고려 사회의 일각에서는 삼국의 계승을 표방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파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이러한 예는 다시 찾아지지 않는다. 고려에서 구성 분자 간의 융합이 보다 촉진된 결과였다. 이 점에서 후삼국 통일은 한국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고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