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길(梁吉)은 양길(良吉)이라고도 한다. 가계, 출생지 및 생몰년 등은 알려진 바 없다.
889년(진성여왕 3) 전국에 걸쳐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농민 봉기는 지속되었다. 혼란한 기회를 이용하여 양길은 북원(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을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반기를 들었다. 북원은 5소경 중 북원경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를 거점으로 하였던 것을 보면 그 세력의 규모가 작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50 열전 10 궁예전에 따르면 892년(진성여왕 6년) 궁예가 기훤(箕萱)의 휘하를 떠나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 후고구려 조에는 890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양길은 궁예에게 북원의 동부 지역을 공략하게 하니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나성(奈城: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울오(鬱烏: 지금의 강원도 평창군), 어진(御珍: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항복하게 하였다.
이것이 891년(진성여왕 5) 10월의 일이었다는 기록(『삼국사기』 권 10 신라본기 10)도 있지만, 여하튼 이로써 양길은 세력 범위를 지금의 강원도 영서 지방으로 확장하였다. 이 소식은 멀리 견훤(甄萱)에게도 전해졌다.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한 견훤(甄萱)은 양길에게 비장(裨將)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단, 양길이 이를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894년 궁예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에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확립하고 양길을 배반하였다. 양길로서는 유능한 부하를 잃었지만, 이후에도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하여 897년에는 국원(國原: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등 30여 성을 차지하였다. 강원도 영서 지방에 더하여 지금의 충청북도 일대도 세력권에 넣었던 것이다.
이때 궁예는 송악군(松岳郡: 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양길은 자신을 배반한 궁예가 큰 세력을 형성한 것에 분노하여 그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에 30여 성의 정예 병사를 동원하여 궁예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아챈 궁예가 선제공격함으로써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상은 『삼국사기』 권 50 열전 10 궁예전에 전하는 바이거니와, 이와 다른 기록도 전한다. 즉 899년(효공왕 3년) 양길이 국원 등 10여 성주들과 함께 궁예를 공격하기로 모의하고, 비뇌성(非惱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로 추정) 아래에 군대를 진격시켰으나 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삼국사기』 권 11 신라본기 11).
900년(효공왕 4)에 궁예는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충주(忠州: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당성(唐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청주〔靑州: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혹은 청천(靑川: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이라고도 함〕, 괴양(槐壤: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900년 10월 국원‧청주‧괴양의 반란군 지도자인 청길(淸吉)과 신훤(莘萱)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투항하였다고도 전한다.
충주 곧 국원이 양길의 세력권에 속하였음은 분명하고, 괴양도 그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궁예는 양길에게 승리한 후 900년 그의 세력과 세력권을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궁예는 지금의 중부 지방을 세력권으로 하게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