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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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 북원을 거점으로 성장한 반신라적인 세력가.
이칭
이명
양길(良吉)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내용 요약

양길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 북원을 거점으로 성장한 반신라적인 세력가이다. 892년 부하인 궁예로 하여금 지금의 영서 지방을 공략하도록 하여 차지하였다.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897년에는 국원성 등 30여 성을 세력권으로 하였다.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900년 그의 세력과 세력권은 궁예에게 흡수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웠다.

키워드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 북원을 거점으로 성장한 반신라적인 세력가.
인적 사항

양길(梁吉)은 양길(良吉)이라고도 한다. 가계, 출생지 및 생몰년 등은 알려진 바 없다.

주요 활동

889년(진성여왕 3) 전국에 걸쳐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농민 봉기는 지속되었다. 혼란한 기회를 이용하여 양길은 북원(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을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반기를 들었다. 북원은 5소경 중 북원경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를 거점으로 하였던 것을 보면 그 세력의 규모가 작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50 열전 10 궁예전에 따르면 892년(진성여왕 6년) 궁예기훤(箕萱)의 휘하를 떠나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 후고구려 조에는 890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양길은 궁예에게 북원의 동부 지역을 공략하게 하니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에 머물면서 주천(酒泉;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나성(奈城: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울오(鬱烏: 지금의 강원도 평창군), 어진(御珍: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항복하게 하였다.

이것이 891년(진성여왕 5) 10월의 일이었다는 기록(『삼국사기』 권 10 신라본기 10)도 있지만, 여하튼 이로써 양길은 세력 범위를 지금의 강원도 영서 지방으로 확장하였다. 이 소식은 멀리 견훤(甄萱)에게도 전해졌다.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한 견훤(甄萱)은 양길에게 비장(裨將)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단, 양길이 이를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894년 궁예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에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확립하고 양길을 배반하였다. 양길로서는 유능한 부하를 잃었지만, 이후에도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하여 897년에는 국원(國原: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등 30여 성을 차지하였다. 강원도 영서 지방에 더하여 지금의 충청북도 일대도 세력권에 넣었던 것이다.

이때 궁예는 송악군(松岳郡: 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양길은 자신을 배반한 궁예가 큰 세력을 형성한 것에 분노하여 그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에 30여 성의 정예 병사를 동원하여 궁예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아챈 궁예가 선제공격함으로써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상은 『삼국사기』 권 50 열전 10 궁예전에 전하는 바이거니와, 이와 다른 기록도 전한다. 즉 899년(효공왕 3년) 양길이 국원 등 10여 성주들과 함께 궁예를 공격하기로 모의하고, 비뇌성(非惱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로 추정) 아래에 군대를 진격시켰으나 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삼국사기』 권 11 신라본기 11).

900년(효공왕 4)에 궁예는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충주(忠州: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당성(唐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청주〔靑州: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혹은 청천(靑川: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이라고도 함〕, 괴양(槐壤: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등의 고을을 치게 하여 다 평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900년 10월 국원‧청주‧괴양의 반란군 지도자인 청길(淸吉)신훤(莘萱)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투항하였다고도 전한다.

충주 곧 국원이 양길의 세력권에 속하였음은 분명하고, 괴양도 그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궁예는 양길에게 승리한 후 900년 그의 세력과 세력권을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궁예는 지금의 중부 지방을 세력권으로 하게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웠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논문

정성권, 「弓裔와 梁吉의 전쟁, 비뇌성 전투에 관한 고찰」(『軍史』 83,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이도학, 「弓裔의 北原京 占領과 그 意義」(『東國史學』 43, 東國史學會, 2007)
金甲童, 「高麗建國期의 淸州勢力과 王建」(『韓國史硏究』 48, 韓國史硏究會,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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