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원(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의 반란적인 세력가 양길(梁吉)의 부하로 활약하던 궁예는 894년(진성여왕 8)에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병력은 3,500명이었는데, 이를 14개의 부대(部隊)로 나누고, 금대(金大) · 검모(黔毛) · 흔장(盺長) · 귀평(貴平) · 장일(張一) 등을 사상으로 삼았다. 사상은 부장(部長)을 일컫는 말이므로, 14개 부대의 장(長)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사상은 궁예가 부대 조직을 갖추면서 임명한 단위 부대의 지휘관인 것이다.
이때 궁예는 사졸들에 의해 장군(將軍)으로 추대되었다. 장군은 본래 중앙의 고위 무관직이었지만, 신라 말에는 지방 호족들이 이를 칭하였다. 호족 밑의 촌주(村主)들은 장군 아래의 무관직인 대감(大監), 제감(弟監)을 칭하기도 하였다. 이 점에서 사상은 대감 혹은 제감에 대비될 수 있는 관직이지만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한편 사상은 각 250명의 병력을 통솔하였다.
그런데 경상북도 영천시에 소재한 청제(菁堤)를 축조할 때 25명의 인원이 역역 편성의 기본 단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25명을 기초로 하는 조직 10단위씩을 1개 대(隊)로 삼아 1명의 사상이 지휘하도록 하였을 것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6세기 전반기에 적용되던 역역과 군역 편성의 기본 원리가 9세기 말까지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사상’은 725년(성덕왕 24)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上院寺銅鍾)의 명문에도 새겨져 있다. 일찍이 이를 관등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고, 신라 17관등 중 제13관등인 사지(舍知)에 비정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