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청제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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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영천 청못 축조 관련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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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영천 청못 축조 관련 기적비.
개설

영천 청제비(永川菁堤碑)는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산7-1번지에 있으며 영천 청못[菁池]의 축조와 중수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1968년에 한국일보사 주관 신라삼산학술조사단(新羅三山學術調査團)이 발견하였다.

내용

두 개의 비 가운데 흔히 ‘청제비(菁堤碑)’라고 부르는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다. ‘병진년(丙辰年)’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 때 새긴 것이고, 반대면의 ‘정원14년(貞元十四年)’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새로 수리할 때 새긴 것이다.

크기는 높이 130㎝, 너비 93.5㎝, 두께 45㎝이다. ‘병진년’으로 시작되는 비문은 전문 10행, 각 행 9∼12글자, 자경(字徑) 4∼5㎝이고 전문 약 105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마모의 정도가 심하여 다수의 글자를 제대로 판독할 수 없다. 글자 모양은 고졸(古拙)한 형태이다.

비문이 쓰여진 연대는 ‘병진’이라는 간지로 보아 536년(법흥왕 23)으로 추정된다. 비문의 내용은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의 명칭, 공사의 규모, 동원된 인원 수, 청못의 면적, 청못으로 인해 혜택 받을 수 있는 농지 면적, 공사를 담당한 인물의 이름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정원 14년’으로 시작되는 비문은 전문 12행, 각 행 4∼12글자, 자경 4∼6㎝이며 전문 130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 모양은 역시 고졸한 면을 지니고 있다.

정원 14년이라는 절대 연대로 보아 비문이 쓰여진 연대는 798년(원성왕 14)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청못의 수리가 완료된 연월일, 비문의 표제, 파손되어 수리하게 된 경위, 수리한 둑의 규모, 수리 기간, 공사에 동원된 인원 수, 관계 담당관의 이름 등으로 되어 있다.

정원 14년명의 내용을 보면, 소내사(所內使)가 청제의 파손 사실을 왕실에 보고하고 구체적인 현황을 파악하도록 지시받은 뒤 수치(修治)공사를 완료하였다. 소내(所內)라는 말을 왕실에 직속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청못이 있는 곳이 소내로 통칭되는 신라 왕실 직할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소내사는 왕실에서 파견한 사람이 아니고 현지인으로서 평소 왕실 소유지를 관리하는 일을 수행하였던 인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왕실 직할지의 관리와 수취에서 소내사 즉 현지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청못이 절화군의 경역 내에 있지만 청제의 파손 사실을 보고하고 파손 현황을 살펴볼 것을 지시받고 수치공사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절화군(切火郡: 영천) 태수(太守)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536년 병진명 비문에서도 지방관이나 촌주(村主)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곳이 536년 병진명 단계부터 798년 정원명 비문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왕실 직할지로 존재해왔고, 왕실 직할지인 만큼 현지 지방관에 의해 수행되는 단순한 역역(力役) 동원방식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수치 공사에는 부척(斧尺: 도끼를 사용하는 기술자) 136인과 법공부(法功夫: 국가에 소속된 일꾼) 등 1만 4,14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를 전국에서 일시에 동원된 인원으로 판단하고 그만큼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전국규모의 공사라고 보기에는 공사 관련자들의 숫자나 관등이 너무 단촐하며, 청못이 위치한 왕실 소유지 역부(役夫)들이 주력으로 징발되고 인접한 2군, 즉 절화군과 압량군(押梁郡)에서는 조역(助役)이 징발되는 것으로 보아 비문에 기재된 인원은 일시에 동원된 것이 아니라 연인원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청제비 정원 14년명에서 전대등(典大等)의 존재가 확인된다. 마모된 비문의 제8행 4번째 글자와 5번째의 글자를 전대등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798년 청못 수치공사에 청못이 있는 왕실 직할지의 역부만으로는 부족하여 인접한 절화·압량군에서 조역을 징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현지인인 소내사가 절화·압량군에서 조역을 징발하기에는 권한이 부족하므로 집사부(執事部)의 차관인 전대등이 관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천 청제비는 신라 수리시설의 실태, 통일신라시대의 중앙 집권 체제와 역역 동원관련 등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청제비 바로 옆에는 1688년(숙종 14)에 세운 ‘청제 중립비(菁堤重立碑)’가 있다. 원래 청제비에서 서쪽으로 5m 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청제비와 나란히 비각 안에 서 있다. 높이 107㎝, 너비 77㎝, 두께 15㎝인 화강암 비석으로 비문은 전문 10행, 각 행 14글자, 자경 5.5㎝이다. 비문의 내용은 청제비가 1653년(順治 癸巳年)에 절단되어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최일봉(崔一奉) 등이 다시 맞추어 세웠다는 것이다. 이 청제중립비를 통해 청못과 청제비를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귀중한 금석문이 소멸을 면하게 된 경위도 알 수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의 수리정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황수영, 일지사(一志社), 1976)
「신라 통일기의 왕실 직할지와 군현제」(하일식,『동방학지』97,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7)
「영천청제비(永川菁堤碑)를 통해 본 청제(菁堤)의 축조(築造)와 수치(修治)」(이우태,『변태섭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邊太燮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 삼영사(三英社), 1985)
「영천청제비(永川菁堤碑)의 병진명(丙辰銘)」(이기백,『고고미술(考古美術)』106·107, 1970)
「영천청제비 정원명(永川菁堤碑 貞元銘)의 고찰(考察)」(이기백,『고고미술(考古美術)』102,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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