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백제의 개차산(皆次山)이었는데 신라의 경덕왕이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쳐 한주(漢州)의 영현으로 하였다. 940년 (태조 23) 죽주로 고쳐 지주사(知州使)를 두었다. 현종 때 광주(廣州)에 예속시켰으며 1413년(태종 13)죽산(竹山)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따라서 죽주라는 명칭은 473년간 사용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일부는 용인군에 편입되고 대부분 안성군에 속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궁예(弓裔)가 처음에 이곳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기훤(箕萱)에게 귀의하였으나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하자, 5년 후에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에게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삼남대로(三南大路)를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의 죽산면 지역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