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901년(효공왕 5)부터 본격적으로 신라에 적개심을 나타내고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면서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曆)에는 이때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904년(효공왕 8)에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정하였다가 911년(효공왕 15)에 다시 태봉(泰封)으로 바꾸었다.
‘마진’은 범어(梵語)에서 크다[大]는 뜻을 가진 ‘마하(摩訶)’와 진인(秦人)이 거주하는 땅이라는 뜻의 ‘cinitana’를 음역한 ‘진단(震旦)’을 합성하여 만든 ‘마하진단’의 약칭이었다는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단’은 본래 인도인이 중국을 지칭하던 말이었으나 점차 동방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마진은 대동방국(大東方國)을 뜻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마진’이라는 명칭에는 발해(渤海)의 국호가 진국(震國)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궁예의 발해 수복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 역경(易經)』에 보이는 ‘제출어진(帝出於震)’에 주목하면서 위대한 황제 국가의 개국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최근에는 ‘마진’이 ‘마니진단(摩尼震旦)’의 약칭이었다고 보면서, 여기에 동방정토(東方淨土)에 대한 궁예의 염원이 담겨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궁예는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정하면서 무태(武泰)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앙에 광평성(廣平省)을 중심으로 병부(兵部) · 대룡부(大龍部) 등 19개의 관부를 설치하였고, 정광(正匡) · 원보(元輔) · 대상(大相) 등 9등급으로 구성된 품직도 설치하였다.
또한 궁예는 이때 청주인(靑州人) 1천 호(戶)를 철원(鐵圓)으로 옮기고 나서 이듬해인 905년(효공왕 9)에 송악(松嶽)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고 연호도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궁예는 이를 전후한 시기에 상주(尙州) 등 30여 주현(州縣)을 차지하였고, 공주 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와 평양 성주 장군(平壤城主將軍) 검용(黔用) 등의 항복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이때 이미 신라를 병탄할 뜻을 품을 정도로 자신감을 가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