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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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불교
개념
불경의 번역 작업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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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불경의 번역 작업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내용

역경에는 강설(講說)과 강석(講釋)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말만의 번역과, 그 말을 문자로 다시 옮겨 책으로 펴내는 일이 있다. 이 역경에 종사하는 승려를 역경삼장(譯經三藏)이라고 하는데, 중국에는 수많은 역경삼장들이 인도어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중국 역경의 기원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서역에서 온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낙양에서 ≪사십이장경 四十二藏經≫ 등 5부를 번역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확실한 한역의 시초로는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 중국에서 활동한 안세고(安世高)와 지참(支讖)을 들고 있다.

중국의 역경이 큰 의의를 갖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사용한 문자가 한문이라는 점과 연관된다. 중국에서 새로운 경전이 들어와 역경이 되면 곧 그것이 우리 나라에 전해져 새로운 불교사상을 꽃피게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승려들 중에서도 역경에 직접 참가한 고승들이 있었다. 백제의 겸익은 중인도의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범어(梵語)를 배우고, 특히 율부(律部)를 전공한 뒤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할 때 범문(梵文)으로 된 율문(律文)을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번역하여 72권으로 엮었다고 한다.

또 신라의 원측(圓測)은 당나라의 현장(玄奘)이 인도로부터 돌아와서 역경을 할 때 그 역장(譯場)의 증의(證義)로서 참석하였고, 그 뒤에도 당나라에서 역경과 저술 등에 종사했으며, 신라의 승려 승장(勝莊)도 당나라에 머물면서 의정(義淨)의 역장에서 증의가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 경전이 들어온 이후 한글을 창제하기까지, 우리 나라의 말은 있으되 글이 없었으므로 말만의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 말만의 번역시기에 원효(元曉)나 의상(義湘)을 비롯한 수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이룬 업적은 오늘날 비록 이것이 한문으로 기술되어 전해지고 있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큰 업적으로 손꼽힌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을 비롯한 수많은 경의 종요(宗要)를 지었는데, 이러한 고승들에 의해서 한국불교는 사상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골격을 이루고 발전해 왔다.

말만으로 이루어진 역경은 또 신라의 방언(方言)으로 기술된 향가(鄕歌)를 그 범주에 넣어 생각할 수도 있으며, 균여(均如)의 방언으로 된 ≪십구장원통기 十句章圓通記≫ 등은 우리 글이 있기 이전의 역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의 창제 이후 비로소 우리말과 글에 의한 경전 번역이 시도되었다. 최초의 ≪훈민정음≫이나 ≪석보상절 釋譜詳節≫은 새로 창제된 우리 글의 쓰임새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였으며, 본격적인 경전의 번역은 ≪능엄경 楞嚴經≫이 그 효시이다.

≪능엄경≫을 간행한 조선 세조 때의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는 유생들의 반발을 받으면서 한글의 홍포와 불교의 흥법(興法)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법화경≫ · ≪금강경≫ · ≪반야심경≫ · ≪원각경≫ 등의 대승경전과 ≪선종영가집 禪宗永嘉集≫ 등의 선서(禪書)를 역간하여 한글 보급에 기여하였다.

이 역경사업에는 고승 신미(信眉) · 수미(守眉) · 홍준(弘濬) 등과 윤사로(尹師路) · 황수신(黃守身) · 김수온(金守溫) · 한계희(韓繼禧) 등 간경도감의 도제조(都提調) 및 제조들의 도움과 힘이 컸다.

이와 같은 국역 불전은 오늘날 학계에서도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문화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간경도감을 세운 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하여 간경도감이 폐지되면서 국가가 주관하는 역경사업은 거의 중지되었고, 이후의 조선시대에는 사찰이 중심이 된 한글 음역(音譯)의 경판조조(經板彫雕)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한글 음역이 성행한 것은 경전의 수지독송(受持讀誦)의 공덕을 기린 것이지만, 동시에 한글 유포에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 경판조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으로는 유교의 입장에서 거부반응을 갖지 않는 ≪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이 음역되거나 번역되고 판화까지 곁들여 상당히 많은 양이 발간된 사실이다. 이것은 유생의 압력을 벗어나면서 불교를 펴려고 한 조선시대 승려들의 사명감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화기에 들어서서는 역경사업이 공명심이나 공리심에서 추진되는 예가 허다하였다. 민족항일기에 불경 번역을 강력히 주장하고 역경사업에 착수했던 고승은 백용성(白龍城)이다.

그는 대중에게 불교 교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말로 번역된 경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는데, 그가 3·1운동 후 옥중에 있을 때 다른 종교인들이 모두 한글로 된 종교서적을 보면서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이와 같은 뜻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는 1921년에 출옥하자 곧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역경에 착수하였으나, 그의 역경사업에 대한 불교계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냉담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몇 번 중단했다가도 다시 계속하여 ≪금강경≫ · ≪능엄경≫ · ≪원각경≫ · ≪화엄경≫ 등의 경전을 번역하였고, 한글로 된 많은 저술도 남겼다.

또 1937년에 간행된 최초의 우리말 ≪불교성전 佛敎聖典≫은 불교 역경사에 기억될 만한 일이다. 이 ≪불교성전≫은 통도사 · 해인사 · 범어사(梵魚寺)의 3본산 종무협회(宗務協會)가 출연한 2,200여 원 중 300원이 역경원에 보조됨으로써 허영호(許永鎬)가 번역하여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역경사업은 다음해에 가서 보류되고 다시 계속되지 않았다. 8·15광복 후에도 일부 승려들에 의해 역경이 다소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크게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이 설립되면서 초대 원장으로 취임한 운허(耘虛)가 역경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꾸준히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번역작업을 계속하여 수십 권의 한글대장경을 편찬하였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이 역경을 포교(布敎) · 도제양성(徒弟養成)과 함께 종단의 3대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그 진척사항도 그다지 원활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참고문헌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불교근세백년』(강석주, 중앙일보사 출판국,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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