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의 지눌(知訥)이 최초로 이 이론을 정립하였다. 지눌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지어서 일체의 언어와 문자, 이론과 사유를 초월해서 화두(話頭)를 잡아 활구(活句)로 증입(證入)할 것을 주장하였다.
『법집별행록절요(法集別行錄節要)』에서는 “말을 여의고 지해(知解:알음알이)를 잊는 경절문의 방편을 인증하여 참선하는 자만이 해탈할 수 있다.”는 경절문사상을 천명하였다. 또한, 경절문을 곧바로 체득할 수 있는 방편으로는 송나라 대혜(大慧)가 주창한 간화선(看話禪)을 채택하였다.
즉, ‘개에게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뜰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등의 화두를 통해서 곧바로 본래면목을 깨닫게 하는 방편을 쓴 것이다. 지눌 이후 우리 나라의 선종에서는 간화선을 방편으로 한 경절문의 공부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오히려 불교의 교학(敎學)을 경시하는 풍조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休靜)이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경절이란, 큰 코끼리가 강을 건널 때 물결을 곧바로 질러가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간화선에 입각한 경절문을 크게 중시하였다.
그의 제자인 언기(彦機)도 『심검설(尋劍說)』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경절문·원돈문(圓頓門)·염불문(念佛門)으로 나눈 뒤 경절문을 최상의 법문으로 취급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진허(震虛)도 『삼문직지(三門直指)』에서 염불문·원돈문·경절문을 세우고, 경절문의 지침서로서 지눌의 『간화결의론』을 제시하였다.
우리나라 선 수행도 모두 이 사상에 입각해서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