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합(閔郃)과 민극(閔郤)은 동일 인물인데, 사서(史書) 간행하는 과정에서 '합(郃)'과 '극(郤)을 잘못 판독하면서 두찬(杜撰)이 생긴 것 같다.
‘민극(閔郤)’으로 새긴 사례는 『삼국사기』 가운데 조선시대에 『 현종실록(顯宗實錄)』을 간행할 목적으로 1711년에 주자했던 주자본(鑄字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13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암고서박물관본(誠庵古書博物館本)에서는 ‘민합(閔郃)’으로 새긴 사례가 확인된다. 그리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도 ‘민합(閔郃)’으로 새겨져 있다. 따라서 민극보다는 민합이 본래의 이름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더 높다.
918년 6월 11일 병진(丙辰)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후백제의 견훤은 그 소식을 듣고 2개월 뒤인 8월 11일 신해(辛亥)에 일길찬(一吉飡) 민합을 보내어 왕건을 축하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민합이 공작 깃으로 만든 부채[공작선(孔雀扇)]와 지리산 죽전(智異山竹箭,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후백제에서 공작선과 지리산 죽전을 고려에 바친 것은 920년(태조 3) 9월에 파견된 아찬(阿粲) 공달(功達)이었다고 하였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고려사』에서는 후백제에서 민합이 오자, 고려 태조 왕건이 광평시랑(廣評侍郞) 한신일(韓申一) 등을 감미현(甘彌縣, 지금의 경기도 안성 일대)까지 나아가 영접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사절요』에서는 태조 왕건 자신도 대중전(大中殿)에 임어(臨御)하여 직접 민합의 축하를 받으면서 두터운 예(禮)로써 대접하고 돌려보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