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절요 ()

삼국사절요
삼국사절요
고대사
문헌
조선전기 문신 · 학자 서거정 · 노사신 등이 단군조선부터 삼국의 멸망까지를 서술하여 1476년에 편찬한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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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삼국사절요는 조선전기 서거정·노사신 등이 단군조선에서 삼국의 멸망까지를 서술하여 1476년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표문에는 총 14권으로 되어 있지만 삼국시대 이전 시기는 별도로 작성되어 실제는 15권이다. 세조의 『동국통감』의 편찬 명령으로 시작하여 신숙주, 이파 등이 참여하여 성종 때 마무리되었다. 편년체로 서술되었으며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삼국유사』·『수이전』 등을 참고하여 서술하였다. 삼국사절요는 조선시대 삼국사 서술의 기본틀이 되었다는 점과 『삼국사기』에 이용되지 않은 자료를 보완한 점 등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의
조선전기 문신 · 학자 서거정 · 노사신 등이 단군조선부터 삼국의 멸망까지를 서술하여 1476년에 편찬한 역사서.
개설

성종을해자(乙亥字)의 주자로 인쇄되었다. 총 14권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사는 외기(外紀)로서 권수 안에 넣지 않고 별도로 쓰였다. 그러므로 서문이나 표문에는 14권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15권으로 편찬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1458년(세조 4) 9월 세조는 문신들에게 『동국통감』의 편찬을 명하였다. 이 때 세조는 우리 나라의 역사책은 빠진 것이 많고 체계가 잡히지 않았으므로, 삼국사와 고려사를 하나의 편년으로 합쳐 편찬하되 여러 책에서 자료를 보완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1463년에 양성지(梁誠之)로 하여금 여러 유생을 데리고 편찬하게 하고, 신숙주(申叔舟)권람(權覽)은 이를 감수하고 이파(李坡)는 그 출납을 맡도록 명하였다. 세조의 『동국통감』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였으나 1466년 이후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동국통감』의 편찬은 세조대에는 완료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하자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한 바 있던 최숙정(崔淑精)경연(經筵)에서 『동국통감』 편찬을 완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예종은 이를 받아들여 편찬을 완수하도록 조처하였으나, 예종이 곧 죽음으로써 편찬사업은 다시 중단되었다.

1474년 성종은 당시 영의정으로 정무를 주도하던 신숙주에게 명하여 글을 아는 관료를 선택해 집에서 『동국통감』의 편찬을 마치도록 하였다. 신숙주는 세조 때부터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한 바 있던 이파로 하여금 이를 완성하게 하여, 1476년 12월 『삼국사절요』라는 명칭으로 바쳐졌다.

서지적 사항 및 내용

이 책을 바치는 표문(表文)은 노사신 · 서거정 · 이파의 이름으로 지어져 첫머리에 실려 있고, 서문은 서거정이 썼다.

서술체재는 편년체이다. 세조 때 편찬이 시도된 『동국통감』은 장편으로 만들어졌다. 장편은 연대순으로 모든 자료를 모아놓은 것으로서,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할 때 초고로 만든 것이 최초의 것이다.

한편, 책 이름이 ‘절요’라는 점에 착안하여 장편의 내용을 줄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원래의 자료가 부족한 한국고대사에서는 장편이 거의 대부분 그대로 실렸을 것이다.

조선 초기 권근(權近)이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쓰면서 삼국시대의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이 예가 아니라 하여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으로 고쳐 서술한 것에 비해 『삼국사절요』는 삼국 당시에 칭하였던 그대로 즉위년칭원법을 채택해 서술하고 있다.

또한, 권근이 신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을 고쳐 삼국의 역사를 각각 독립적으로 대등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신라가 통일한 676년(문무왕 16) 이후부터 신라를 정통으로 다루었고 발해사는 제외시켰다.

한편, 연대 표시에 있어서는 신라와 고구려가 병존하기 시작한 신라시조 19년부터 문무왕 9년의 통일까지는 중국 · 신라 · 고구려 · 백제의 연기(年紀)를 작은 글자 2행으로 썼으며, 그 전후는 신라왕의 연기를 큰 글자로 앞에 쓰고 중국연기는 주(註)로 달았다. 이러한 표기방식은 조선시대의 삼국사 서술에 있어서 관례가 되고 있다.

서술내용은 『삼국사기』 · 『삼국유사』 · 『수이전(殊異傳)』 등에서 국가정치와 관련이 되는 기록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특히, 『삼국사기』의 본기를 중심으로 서술하였지만, 삼국 상호간의 전쟁기사는 하나의 편년에 의하여 서술함으로써 기사의 중복을 피하였으며, 삼국 간 기사의 착오를 모순이 없도록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의 지(志)나 열전(列傳)의 내용으로 장황한 것은 주로 처리하였다.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실린 신화나 전설 등도 상당히 싣고 있다. 다만 단군조선에 대한 신화는 인용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의의와 평가

『삼국사절요』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삼국시대 말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여 민족사의 체계를 잡은 역사서이며, 세종과 세조 때 역사학의 학풍에 따라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조선시대 삼국사 서술의 기본틀이 되었다는 점과, 『삼국사기』에 이용되지 않은 자료를 보완한 점 등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수이전』은 오늘날 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인용된 자료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현전하는 『삼국사기』의 옛 판본 중 완질을 갖춘 것으로서 제일 오래된 것은 1512년(중종 7) 경주에서 목판으로 찍은 것인데, 이 판본에는 많은 오자가 있다.

그런데 『삼국사절요』에서 이용한 자료는 고려시대 아니면 조선 초 1394년(태조 3년)에 찍은 판본을 대본으로 이용한 것이므로, 『삼국사기』의 오자를 바로잡는 데 아주 귀중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또한 1485년에 간행된 『동국통감』 편찬에 있어 고대사의 대본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역사서술(歷史敍述)과 역사인식(歷史認識)」 상·하(한영우, 『한국학보』 15·16, 1979)
「조선초기(朝鮮初期) 역사서술(歷史敍述)과 역사인식(歷史認識)」(한영우, 『한국학보』 7, 1977)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 대한 사학사적고찰(史學史的考察)」(정구복, 『역사교육』 18,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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