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년의 간지를 따 을해자라 명명하였다. 이 활자는 안평대군(安平大君)용(瑢)의 글씨를 자본으로 한 경오자(庚午字)를 녹여 주조하였다.
그와 같이 경오자를 녹여 사용한 이유는 글자체가 원나라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인 까닭에 반원친명(反元親明)하기 위한 정책적인 면에서라기보다는 세조의 찬탈(簒奪)을 극력 반대하다 사사(賜死)당하였던 안평대군에 대한 적대적 감정(14조)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을해자는 주자발(鑄字跋)과 자세한 기록이 전하여지고 있지 않아 초기에 어떠한 책들이 인출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현재 전래되고 있는 을해자본을 보면, 1461년에 『훈사(訓辭)』를 찍어낸 것이 초기의 것이고, 선조 때 나온 『시학집압운연해(詩學集押韻淵海)』까지 합치면 무려 146종이나 된다.
을해자본을 최초로 고증한 이는 이인영(李仁榮)이다. 그는 이병기(李秉岐)의 암시에 따라 강희안체(姜希顔體)인 초간본 『응제시주(應製詩註)』를 비롯한 이첨(李詹)의 서문(序文) 전부와 발문(跋文) 1부가 강희안의 서사(書寫)임을 우선 확인한 다음, 모든 을해자본을 고증하였다.
그의 설에 따르면, 강희안의 해서체(楷書體)의 특징은 조맹부체의 약간 납작한 점과 공통한다고 하였다. 글자의 크기는 세로 1㎝, 가로 1.3㎝로 높이에 비하여 넓이가 넓으니, 이와 같은 특징은 『북정록(北征錄)』 등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을해자는 대자·중자·소자의 3종으로 주조되었으며, 대자는 세로 2㎝, 가로 2㎝이고, 중자는 세로 1.2㎝, 가로 1.5㎝이며, 소자는 세로 1㎝, 가로 0.7㎝이다. 그 중에서도 강희안체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중자라고 하였다.
중자는 대자에 비하여 많이 사용되었으며, 소자는 주로 중자의 아래에 쌍주(雙註)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너비가 좁은 듯하다고 하였다.
을해자는 갑인자(甲寅字)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사용되었으며, 임진왜란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주용되었기 때문에 1484년(성종 15)에는 “갑인자, 을해자가 정묘하나 자체가 약간 커서 간질(簡帙)이 변중하고 또한 이미 해가 오래되어 많이 산일(散佚)되었으며, 비록 보주(補鑄)하여 쓰더라도 처음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또, 1603년(선조 36)의 기록을 보면, 실록을 인출하는 데 을해자가 닳고 없어진 것이 있어 목활자를 보각(補刻)하여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춘추관의 계(啓)도 있다. 이 때에는 목활자가 크게 보각되어 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66년(세조 12)에 을해자로 찍어낸 『구급방언해(救急方諺解)』 2권을 비롯하여 명종 연간의 『남화진경대문구결(南華眞經大文口訣)』 등 여러 종의 한글활자 인본이 전래되고 있다.
이 활자의 합금비율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일본이 약탈해 간 을해자는 193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의 댈런드(Daland,J.) 교수가 분석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동 79.45%, 석 13.20%, 아연 2.30%, 철 1.88%, 연 1.66% 다금속 0.45% 등이다. 그러나 일본으로 유출된 을해자로 찍은 인본과 그 활자의 실사(實査)에 의한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현재 그 활자가 을해자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또한 이 활자를 정음청(正音廳)에서 주조하였는가 혹은 주자소(鑄字所)에서 주조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논란되고 있으나, 1454년의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에 따르면 주자소에서 주자하였다.